베트남 도이모이 “오늘의 박항서, 내일은 모른다”

호치민 인근 동나이 항구에서 정박중인 수출 화물선

지속가능한 개발 스토리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아시아엔=서덕수 한동대 공간환경시스템공학부 교수] 아세안(ASEAN) 국가 중에 특히 베트남의 괄목할 만한 경제성장세가 매섭다. 전 세계를 강타한 코로나 팬더믹으로 잠시 주춤하지만 지난 수십년 동안 6~8% 경제성장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고 이를 견인했던 해외직접투자(FDI) 규모는 날로 증가하고 있다.

2001년부터 2017년까지 연평균 37억4200만 달러가 베트남으로 흘러들었고 정점을 찍었던 2008년에는 연 평균치 8배에 달하는 무려 257억9100만 달러가 유입되었다.

유입된 해외투자의 60% 이상이 대규모 생산제조시설에 투자되었고, 이어 약 17%가 부동산개발 및 건설에 집중되었다. 아세안 국가 중 근래 가장 급성장하는 국가인 베트남의 성공스토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국내 투자자본뿐 아니라 국내외 제조 및 생산 회사들도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눈을 돌려 앞 다퉈 진출하기 시작했다.

코로나 팬더믹 이전 한국-베트남간의 항공편이 매주 약 180편 이상이었으니 그 왕래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 갈 것이다. 현재는 하늘길이 막혔지만 코로나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돼 보급되는 순간 국가간 산업교류 규모는 예전으로 회귀할 것이다. 그렇다면 통일을 이룬 공산주의 국가 베트남이 중앙정부 주도의 비효율적 산업경제 구조로 쇠락의 길을 걷던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와는 달리 어떻게 이런 성장 반전 스토리가 가능했을까?

응우옌 푸 쫑 공산당 서기장이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하는 장면을 호치민이 내려다 보고 있는 듯하다.

국가적 변화와 개혁의 핵심 모멘텀은 1986년 제6차 공산당전당대회에서 국제정치 및 세계경제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시장개방을 선언했던 도이모이(??i M?i, Open Door) 경제개혁을 꼽는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근본 체질을 완전히 개선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사회주의 기초를 세운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된다. 가령 토지의 국·공유에서 사유 체계로 전환되는 근본적 구조개혁이다.

베트남의 경제성장 및 도시개발 연구의 서론이 대부분 1986년 도이모이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다. 많은 학자들이 도이모이 경제개혁을 해석하면서 오늘날 베트남의 다이내믹을 풀어간다. 그러나 많은 한국인들은 베트남 하면 전쟁이나 쌀국수를 떠올리지 도이모이는 생소하다.

베트남에 수백억씩 들고 진출하는 한국 투자자들조차 베트남 도이모이의 이해 없이 한국식으로 접근하다 실패하는 사례를 종종 만나게 된다. 도이모이를 알아야 베트남이 보인다.

1986년 단행된 도이모이의 기본정책 방향은 국민들의 실질적 삶을 개선하는 매우 현실적인 경제정책이다. 초기 개혁은 기존 중화학공업 일변도를 탈피하고 농업 및 경공업 발전을 장려하는 미시적인 접근이었다. 개인의 농업, 경공업, 가내수공업 등을 허가해서 자율적인 경제활동을 허가했고 식량 및 소비재 부문의 발전을 도모하였다. 내수시장을 완전 자율화하면서 해외투자를 유치했고 이는 시장규모 증가로 이어졌다.

도시개발 관점에서 가장 큰 체질개선은 토지의 사유방식 전환이다. 1987년, 1993년, 2003년, 2013년 4번에 걸친 토지법 개정을 통해 토지사유화 개념을 현실적 토대 위에 세웠다. 토지는 개인간에 토지사용권(LURC) 명목으로 변경, 거래, 임대, 상속, 담보권리 등이 가능하도록 했고 자연스레 토지시장의 등장으로 부동산개발이 본격 궤도에 진입했다.

외국인에게도 개발을 허용함으로써 해외부동산 투자자의 본격 진출이 이뤄지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베트남은 외교적으로 해외국가들과 관계개선 강화를 통해 무역을 증대시키고 교역시장을 다양화했다. 또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하는 등 중장기적 거시경제 로드맵을 그리면서 세계경제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대외개방 정책을 본격화하기 위한 일례로 해외동포의 투자우대정책을 들 수 있는데, 베트남 국내 투자시 세제혜택을 보장하는 것을 명시했다. 심지어 과거 반정부세력으로 몰려 해외로 도피했던 이들에게도 국내에 투자한다면 사상이나 과거를 묻지 않지 않고 오히려 러브콜을 보낸 것이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한국사회에서는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경우다. 경제발전을 위해서 해외자금 유치와 기술 및 우수인력 확보를 최우선시 한 매우 유연한 국가정책이었다. 이는 당시 해외교포의 베트남 송금이 줄을 이어 국내 국민총생산의 10%를 넘었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로 화제가 되었다.

빈그룹 창시자 팜냣붕

부동산 최대재벌로 <포브스> 아시아 부호 리스트 상단에 이름을 올린 베트남 빈그룹 창시자 팜냣붕(Pham Nhat Vuong)이나 최근 괄목한 성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비엣젯항공사 설립자 응웬티풍타오(Nguyen Thi Phuong Thao) 등은 소련과 동유럽 등에서 유학하며 부를 축적해 베트남으로 돌아와 국가경제를 견인한 경우다.

또 미국, 영국, 캐나다, 프랑스 등지에서 벌어들인 수입으로 베트남에 회사를 설립하거나 직접 국내사업에 뛰어든 재외베트남 기업인도 한둘이 아니다.

이렇게 도이모이정책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국가경제 발전을 위해 모든 국민의 역량과 재력을 집중시켰다. 도이모이의 심층적 이해를 위해선 국부로 불리는 ‘호치민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많은 학자들이 도이모이는 베트남공산당의 주요 이념이자 헌법 가치인 호치민 사상의 구현체로 여긴다. 또한 호치민 사상의 핵심은 표면적으로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한 공산주의를 드러내지만 심층적 사상은 ‘민족주의’와 ‘실용주의’라 본다.

비엣젯항공사 설립자 응웬 티풍 타오

공산주의는 제국주의를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을 위한 세력 집결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중에 베트남을 지배했던 프랑스와 일본으로부터 독립을 위해 反프랑스 연합단체가 구축되는데 이것이 베트남독립연맹, 즉 비엣민이다.

일본 패망 후 비엣민은 임시정부 성격의 국가해방위원회를 선출하고 호치민을 위원장으로 추대한 뒤 곧 이어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여기서 채택한 10대 국가재건계획에는 민족주의 핵심사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국민재산 공유화, 거대농지개혁 등의 공산주의 원칙은 없고 △독립쟁취 △군대양성 △불공정 징세 철폐 △민주적 권리 공표 등 민족주의적 요소들이 대부분이다. 호치민의 비엣민이 하노이를 점령하고 베트남민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하는데, 당시 독립선언서는 재미있게도 미국의 독립선언서와 매우 흡사하다. 호치민에게 가장 큰 목표는 오로지 민족의 자유였다.

그리고 또 하나의 목표는 경제발전을 통한 국익이었는데 그는 늘 최우선 과제로 국민의 자유와 행복을 강조했다. 단, 국익에 기반한 개인의 번영이었다. 국익을 위해서는 호치민에게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었다. 그는 생전 “외교관계에서 친구는 더 많이, 적은 최대한 적게”를 강조했는데 국익을 위한 그의 실용적 문호개방 정신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1884~1945) 독립을 위해서 전쟁을 불사하고 수많은 목숨을 희생하며 투쟁했음에도 불구하고 1945년 정권을 잡은 호치민은 프랑스에 수차례 베트남 국가건설을 위한 투자를 요청했다. 뿐만 아니라 국내 사망자 3백만명, 부상자 2백만명의 희생을 낸 베트남전쟁(1955~1975) 후에도 베트남은 곧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이는 세계경제를 이끄는 미국의 투자유치를 통해 국가의 경제재건을 도모하려는 호치민의 실용주의 사상의 실천으로 해석된다.

한국의 정서로는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명분보다는 국익과 실리를 선택한 호치민의 실용주의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1986년 도이모이 경제개혁 역시 공산주의 진영이 혐오하는 자본주의적 시장개방이라는 급진적 카드를 빼든 것도 아이러니하다. 이것은 사회주의 국가 기초를 흔드는 위험한 도전이지만 국가경제 재건을 위한 특단의 조치로 실리적, 실용적 유연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민족주의와 실용주의가 빚어낸 베트남 도이모이는 계속 발전 중이다.

한편 지금까지 한국의 베트남 투자 열풍은 대단했다. 이를 반영하듯 베트남 내 투자국 1위가 한국이다. 기업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차체도 자매결연을 맺으러 베트남 지방성의 문을 두드리고 국내 대학도 교육협력을 위해 적극 진출했다.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 열풍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아무도 모른다.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청소년축구대표가 아시안컵, 아시아게임뿐만 아니라 60년만에 2019동남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끌면서 양국의 유대관계는 한편의 드라마였다. 베트남전쟁 승리 이후로 이렇게 많은 국민이 베트남 국기를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적이 없다고 한다. 특히 많은 이들의 다른 손에는 태극기가 들려 있었다.

그러나 베트남과의 지속적인 협력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코로나 이슈로 하늘문을 걸어 잠그면서 외교 충돌을 빚더니 양국 관계는 순식간에 싸늘해지고 박항서 효과는 갑자기 사라졌다. 나라에 위협이 되니 친구가 순식간에 적이 되었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실용주의가 혼합된 베트남의 도이모이 정치경제 마인드를 알면 한편으로 이해가 된다. 한국민에게 ‘한번 히딩크는 영원한 히딩크’지만 베트남에선 “오늘의 박항서가 내일도 박항서일지 아무도 모른다.” 국제사회에서 당연한 이야기지만 베트남은 특히 자국에 지속적으로 이익이 되어야 친구로서 오래 간다.

다시 하늘길로 자유롭게 오갈 때 돈보따리 싸들고 베트남으로 향하는 투자자 기업인이나 국제협력을 위한 정부 관계자들은 베트남의 호치민 실리주의를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베트남 파트너와 술잔을 기울이며 ‘브라더’ 관계를 맺었다 해도 너무 의리나 명분에 기대지 말고 서로 실익을 추구하는 동반성장이 지속가능한 성공의 핵심이다.

서덕수 한동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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