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진한 우정···故 김소진 작가와 정홍수 평론가

생전의 김소진 작가

정홍수 강출판사 대표, 김 작가 습작시 알려

[아시아엔=박수진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우리는 다 반백이 됐는데, 이 친구만 젊은 모습 그대로 남아 있네요.”

문학평론가 정홍수 강출판사 대표는 얼마 전 오랜 친구의 시 한편을 세상에 선보였다. 1997년 서른넷 나이로 요절한 소설가 고 김소진 전 <한겨레신문> 기자가 서울대 영문과 4학년 재학 때 쓴 습작시다.

1985년 서울대 단과대별 문학회를 연합한 ‘대학문학운동협의회’의 행사자료집 <4월혁명과 통일문학>에 실린 ‘함경도 아바이’라는 제목의 이 시는 김소진의 전집이 발간된 지금까지도 알려진 적이 없었다.

시를 처음 찾은 사람은 서울대 기록관장인 윤대석 국어교육과 교수다. 윤대석 교수는 서울대의 학생운동 자료를 정리하던 중 기록관 소장자료에서 이 시를 발견하고 김소진씨 문우들에게 보여줬다.

1985년 ‘대학문학운동협의회’ 행사 자료집 <4월혁명과 통일문학’에 실린 김소진 작가의 시 ‘함경도 아바이’. <사진 윤대석 서울대기록관장 제공>

윤 교수는 전화 통화에서 “교과서에도 실린 김소진의 소설에 자주 나오는 아버지에 대한 시라는 걸 알아보고 김소진을 해명하는데 도움이 되겠다 싶어 알렸다”고 했다.

미발표작임을 확인하고, 윤 교수로부터 시를 건네받은 이가 바로 정홍수 강출판사 대표다. 김소진 작가와 서울대 82학번 동기(정 대표는 국문과)이자 절친한 문우로 김소진의 첫 소설집과 유고집에서 전집까지 편집인으 참여해 만들었다. 등단도 김소진 소설에 대한 평론으로 했다.

정수홍 대표와 김소진 작가

6월 30일 서교동 강출판사에서 만난 정 대표는 “그 친구(김소진)가 워낙 부지런하게 작품을 발표해서 미발표작이 거의 없었다. 새로운 작품을 찾은 것도 기쁘지만 시 자체가 훌륭하다”고 말했다.

<쥐잡기>, <자전거 도둑> 등 김소진 작가의 소설을 관통하는 것은 전쟁 때 월남한 아버지를 둘러싼 연민과 회한이다. “함경도 아바이가 앓아 누운 방 한 구석엔”으로 시작해 “함경도 고향땅이 사태지며 아바이 한 줌 흙 곁으로 밀려오는/그런 꿈만 꾸며/살아 얻은 구차한 설움일랑 두고/함경도 아바이 지금은 안녕”으로 끝 맺는 시 ‘함경도 아바이’는 곧 월남민 아버지를 둔 자신의 이야기였다.

정 대표는 “당시 대학생들이 쓰는 시란 게 어느 정도 관념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 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등단작 ‘쥐잡기’로 가는 길목쯤 될 것 같다”고 했다.

이 시가 정 대표에게 의미가 남다른 이유는 또 있다. 두 사람은 1982년 계열별 모집으로 서울대에 입학했다. 일곱 반까지 있었던 ‘어문반’에서 1학년 때 같은 수업을 들었지만 이후 국문과와 영문과로 각각 진학해 그리 가깝지는 않았다.

어느날 정 대표는 우연히 길음동에서 방위로 복무하던 김소진을 만나 그의 집으로 가게 된다. 소설을 쓰고 있는지도 몰랐던 김소진이 꺼내온 것은 우리말 어휘를 촘촘히 정리해둔 대학노트였다. 학생운동이 아닌 순수문학에 매진하리란 꿈을 공공연히 얘기하기 힘든 때였다. 그때 처음으로 둘은 문학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눴다.

그날 “너희 아버지, 어머니 얘기를 쓰면 좋은 문학이 될 것 같다”는 정 대표 조언을 가슴에 새긴 것일까. 몇 년 후 김소진은 월남민 아버지가 나오는 소설 <쥐잡기>로 문단에 데뷔한다. 출판사에 근무하며 등단을 꿈꾸던 정 대표가 소식을 듣고 연락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마포의 서울대총동창회관에서 결혼할 때는 정홍수 대표가 사회를 보고 은사인 김윤식 문학평론가(당시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주례를 섰다.

이후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전업작가가 된 김소진은 정 대표가 차린 강출판사에 작업실을 얻어 왕성하게 작품을 발표했다. 소설 속에 정홍수를 은근히 등장시키기도 했다.

김소진의 뒷자리에서 몰래 쓴 ‘김소진론’으로 정홍수도 평론가에 데뷔했다. 김소진은 선하디 선한 성품에 등단이 늦어지는 친구에게 자극을 주려 장난스레 정홍수를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김소진은 나 없어도 얼마든지 썼겠지만, 김소진이 없었으면 나는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정홍수는 말한다.

그런 친구, 김소진이 병을 얻어 황망하게 떠나버렸다. 평론가로서도 작가 김소진의 빈자리는 크다. 정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불우한 가족사를 가졌지만 문학적으론 큰 자산이었고, 그것을 이야기로 엮어낼 지성이 있었던 김소진이 떠난 후 한국문학의 튼실한 리얼리즘적 전통을 감당하는 영역의 한 축이 사실상 비어버렸다. 6·25를 직접 체험한 세대 이후로 분단소설의 전통에 생긴 공백을 메울 수 있는 작가였기에 더욱 아쉽다.”

지금도 정홍수의 삶 가까이에 늘 김소진이 있다. 일산에 살면서 매일 아침 ‘김소진로’로 이름 붙은 길을 걸어 출근한다. 착실한 가장이었던 김소진은 한겨레 기자 시절 월급과 원고 청탁료를 모아 일산 신도시에 1기로 입주했다. 살기 좋은 곳이라며 전세값까지 빌려주면서 정 대표를 불러들였다. 매일 마포의 출판사로 함께 출근하고, 종일 붙어 있던 나날이 생생하다고 했다.

김소진에 대해 얘기한 신문 기사를 표구해 사무실 그의 자리 곁에 놓았고, 매년 4월 김소진의 기일을 즈음해 시인 안찬수·평론가 정진석 등과 용인의 묘소를 찾는다. 김소진의 10주기에 고인을 사랑하는 선후배 문인이 모여 추모문집 <소진의 기억>(문학동네)을 내기도 했다.

대산문학상을 받은 두번째 평론집의 머리말에 정홍수는 이렇게 썼다. “한 친구가 있었다. 그가 이 책을 보면 웃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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