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임사 전문] 양상우 한겨레 사장 “무조건 옳다는 자기최면 벗고 ‘혁신·도전의 역사’를”

양상우 한겨레 대표이사

2017년 3월부터 3년간 한겨레신문사를 이끌어온 양상우 사장이 지난 20일 주주총회를 끝으로 대표이사 사장직을 물러났습니다. <아시아엔>은 양상우 대표이사의 퇴임사 전문을 싣습니다. <편집자>

사랑하는 한겨레 임직원 여러분,

한겨레만을 벗 삼아 살았던 26년 4개월, 숨 가빴던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네요. 살아온 하루하루를 생각하니 결코 부족한 기간이 아니었음을 새삼 깨닫습니다.

마흔 한살 나이에 침몰 위기에 있던 한겨레의 임시 선장을 맡았고, 2011년과 2017년 두 차례의 대표이사로 6년 동안 여러분과 함께했던 기억을 영원히 가슴에 품고 한겨레를 떠납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저에게는 힘에 부치고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제 인생의 가장 소중한 기간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제가 한겨레와 함께할 수 있도록 해 주신 한겨레 동지 여러분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럴 수는 없어 며칠째 고민했는데도 드릴 말씀이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아마 지난 세월 동안 드린 말씀이 이미 많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만, 그간의 제 마음가짐을 고백하듯 밝히며 한겨레 생활을 마감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동안 조직 ‘한겨레’와 그 구성원인 ‘한겨레 동료’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엔 언제나 한겨레라는 조직을 선택하려 했습니다. 저는 한겨레 임직원 모두를 가슴에 담으려 애썼지만 언제나 제 사랑을 온전히 바친 대상은 ‘한겨레’ 그 자체였습니다.

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사적 욕망’보다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공적 가치’를 의식적으로 앞세우고 싶어 했습니다. 때문에 저를 포함한 모두의 욕망이 가치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항상 경계하며 살고자 했습니다.

저는 진보언론의 소명을 다하려면 때론 ‘화석’같이 느껴지는 교조적 관점보다, 우리 사회의 ‘젊음’에 한겨레가 눈높이를 맞추며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믿었고, 그 믿음을 현실에서 실천하려 애썼습니다. 진보의 의미는 ‘미래’이고 진보의 주체 또한 ‘미래 세대’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임이 두려워 의사결정을 미뤄선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구나 최고의사결정권자인 CEO로선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결정을 위해 갓 들어온 신입사원이 하는 일까지도 꼼꼼히 배우고 챙기려 했습니다.

저는 한겨레 또한 사회 여느 조직이나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고 여기며 일해 왔습니다. 늘 저 스스로를 경계하고 동료는 물론 자신까지 속이는 조직 문화를 최소화하며, 해소해야 할 적폐가 있는지 살피려 애썼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런 태도와 행위에는 균형감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한계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구성원들 대신 조직을 우선하는, 때로 노골적이었던 이런 태도는 어쩌면 자본가의 그것과 닮아 있었을지 모릅니다. 멀리 있는 ‘조직 한겨레’만 보다가 가까이 있는 ‘동료들’을 보지 못한 경우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사적 욕망’과 ‘공적 가치’를 구분하려는 제 태도는 되레 ‘당신이야말로 욕망 덩어리’라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돌아왔습니다. 돌이켜보면 틀리지 않은 말이라고 느낍니다. 때문에 한겨레 공동체의 많은 에너지가 저를 둘러싼 논쟁으로 허비됐습니다. 모두 다, 세월과 함께 성숙하지 못한 채 젊은 시절의 ‘열정’만을 붙잡고 있었던 저의 부덕이 낳은 결과입니다.

저는 처음 대표이사가 된 이후 항상 젊은 피의 수혈에 힘을 쏟았습니다. 급격한 불경기로 취업난이 심해지면 훌륭한 인재들을 한겨레인으로 만들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며 반가워했습니다. 하지만 새 식구가 된 그들을 만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무능한 짝사랑’의 귀결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부조리를 최소화하기 위해 공동체의 규율과 기강을 세우려 한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반복적으로 좌절됐습니다. 수십년 동안 뿌리내려온 한겨레 조직문화의 디테일까지 더 살폈다면 좋았을 일이었습니다.

제가 한겨레호를 이끄는 동안 쌓인 공(功)이 있다면 그것은 CEO가 누구든 관계없이 꿋꿋하게 한겨레를 지켜온 동료 여러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숱한 과(過)는 온전히 제 책임으로 떠안고 떠나겠습니다. 훗날 잡초가 무성해지고 이끼에 덮이더라도, 각고(刻苦)의 흔적을 누군가 알아준다면 저에게는 더 없이 고맙고 기쁜 일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한겨레 동료 여러분

지난 2004년 80명의 동료들이 침몰 위기의 회사를 떠나던 시절 임직원 여러분께 쓴 ‘꿈은 이뤄진다’는 글을 시작으로 지난 16년여 동안 한겨레의 생존과 발전을 위해 많은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첫 임기를 마치던 2014년 3월 퇴임사에 쓴 뒤 지금까지 이런 저런 계기를 통해 한겨레 임직원들에게 5차례나 드린 말씀이 있습니다. 6번째로 또 드리는 게 의미 있는 일인지, 혹여라도 성의 없는 퇴임의 변이라고 비판 받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만, 퇴임사의 마지막 말씀으로 담고자 합니다.

“한겨레와 한겨레인은 무엇을 해도 무조건 옳다”는 자기최면에서 벗어나, ‘혁신과 도전의 역사’를 쓸 정의로운 후배들에게 미리 경의를 표합니다.

욕망이 가치를 이기고 루머가 진실을 덮으며 과거와 미래가 물구나무서는 일 없이, 한겨레와 한겨레 가족들이 힘차고 정의롭게 전진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한겨레 동료 여러분

안팎으로 어려운 시기이지만, 언제나 위기를 기회로 삼은 한겨레의 역사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한겨레를 향한 도전의 파도는 끊임없이 밀려올 것입니다. 그러나 굴하지 않고 응전하는 한겨레와 한겨레인을 굳게 믿습니다. 한겨레와 김현대 새 대표이사를 포함한 임직원 모두에게 행운이 가득하길 두 손 모아 간절히 기원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년 3월 23일 15•17대 대표이사 사장 양상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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