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6일] 1986년 인류 대재앙 예고한 체르노빌 폭발
2004년 이집트 2500년 된 석관 공개
2004년 4월26일 이집트 문화재 당국은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시대의 2500년 된 석관을 전격 공개했다. 발굴에 참여했던 프랑스 고고학팀은 당시 카이로 남쪽 사카라에 위치한 4800년 된 피라미드 부근에서 이 석관이 놓인 무덤을 발견했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도서관은 인류 역사상 가장 웅대한 도서관으로 정평이 나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당시 알려져 있던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했고, 그 번영은 국경을 넘어 저 멀리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가 사망한 뒤에도 그의 계승자들은 지중해 지역에 그리스 문명을 전파시켰다.
기원 전 305년 이후 이집트의 하류지방에는 프톨레마이오스라고 알려진 통치자들이 그리스 성격을 띤 국가를 설립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이다.
이 도서관의 건립은 프톨레마이오스 소터 1세(Ptolemaios Sorter)에서 시작됐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모든 나라들로부터 책을 수집했던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피라텔포스(Ptolemaios Philadelphos, B.C. 309~246) 때 와서 결실을 봤다. 이들 통치자들은 희랍의 모든 자료를 수집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책들을 다 모아서 알렉산드리아를 학문과 지식의 보고로 만들려는 계획을 가졌던 것이다.
2001년 일본 고이즈미 내각 출범
2001년 4월26일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 純一?, こいずみ じゅんいちろう, 1942년 1월 8일 ~ ) 당시 자유민주당 총재가 일본의 총리 자리에 등극했다.
그는 중의원 의원(12선)과 내각 총리대신(제87·88·89대), 우정대신(제56대)과 후생대신(제73·74·86대), 자유민주당 총재(제20대)를 지냈다. 총리로 재임할 당시 2차 대전 이후의 일본 정권으로는 사토 에이사쿠와 요시다 시게루 다음으로 긴 장기 집권(1980일)을 했다. 나카소네 야스히로 이후로 사임하지 않고 임기를 끝까지 마친 자유민주당 총재가 됐다.
한일관계 회복을 위해 애썼지만 노무현 정부 시절 시마네 현 의회의 ‘다케시마의 날’ 제정으로 결실을 못봤다. 고이즈미 뒤를 이은 아베 신조 내각과 후쿠다 야스오 내각 또한 고이즈미의 노선을 기본적으로 답습, 일본에서는 21세기 일본 정치와 세계 정치에도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로 기록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당초 수상 후보로 지명되지 않았다. 당시 노나카 히로무가 일본의 가장 유력한 수상 후보로 지명됐다. 그러나 부라쿠민(部落民, ぶらくみん)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총리가 되지 못했다.
부라쿠민은 전근대 일본신분제도에서 최하층 천민을 가리킨다. 신분제 철폐 이후 근현대 일본에서도 여전히 천민집단의 후예로 차별 대상이 되고 있다. 아이누인과 재일 한국인, 재일 중국인, 류큐인과 함께 일본 내의 대표적 소수집단이다.
이에 따라 출신상의 문제가 없는 고이즈미가 노나카 대신 수상 후보로 지명됐고, 결국 수상이 된 것이다.
조부인 고이즈미 마타지로와 부친인 고이즈미 준야도 중의원 의원을 역임했다. 부친은 방위청 장관도 역임했다. 큰 아들 고이즈미 고타로는 배우로 활동 중이다. 차남 고이즈미 신지로는 2009년 7월21일 열린 중의원 선거에서 준이치로의 지역구를 이어받아 출마, 당선됐다.
1997년 중국 공산당 원로 북경시장 팽진 사망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북경 시장을 지낸 중국 공산당의 원로 팽진(彭眞)이 1997년 4월26일 밤 사망했다. 향년 95세.
팽진은 1902년 산시성(山西省) 곡옥현에서 출생, 타이위안(太原) 사범학교 졸업 뒤 학생운동·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1926년 21세 나이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중국 북부지방에서 항일운동과 국민당에 대한 게릴라 활동을 펼쳤다.
1941년 연안으로 가 당조직 부장에 임명됐고, 1945년 제7차 당 대회에서는 정치국원으로 선출됐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뒤 중앙인민정부위원이 됐으며, 1951년 베이징(北京)시장, 1954년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위원장, 1956년 중앙정치국위원에 올랐다. 1960년 루마니아공산당대회에 참가, 당시 소련 서기장 N.S. 흐루시초프와 논쟁을 벌였다. 1961년 저우언라이(周恩來)와 함께 ‘스탈린 격하’로 알려진 소련 공산당 제22차 회의에 참석, 중·소이념논쟁에 불을 붙였다.
일본이 패퇴하자 팽진은 요녕과 길림, 흑룡강 등 조선족들이 흩어져 사는 3개성을 관할하는 동북국 서기로 임명됐다. 1965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지 1년 뒤인 1966년 5월 북경시장과 일체의 공직에서 해임 당했다. 당시 베이징의 지도급 지식인들의 모임인 삼가촌(三家村)그룹의 배후자라는 이유로 루딩이(陸定一) 등과 함께 반당집단으로 몰려 1966년 숙청된 것이다. 그러나 등소평이 복권한 직후인 1979년 다시 회복, 1983년에는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으로 선출됐다. 1988년 제7기 전국인민대회 이후 은퇴했다.
사회주의 법률체계에 밝고 모택동이 내린 임무수행에 철저한 것으로 중국공산당 내에 소문나 중국공산당의 중요 인물이 됐다.
1986년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 발생
1986년 4월26일 새벽 1시24분 소련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 북동쪽 100km 지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가동 중인 4기 가운데 제4호기 원자로가 터빈발전기의 관성운전시험 중 폭발했다.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는 이날을 20세기 역사에서 전쟁을 제외한 가장 큰 재앙의 날로 정했다.
사고는 시험가동 중 핵연료가 초고온 상태로 변하자 주위의 냉각수가 순간적으로 끓어 엄청난 양의 수증기가 폭발하면서 발생했다. 사고조사 결과 체르노빌 기술자들이 원자로 시험가동 중 안전절차를 위반해 노심(爐心)의 연쇄반응이 통제 불가능 상태가 된 것으로 나중에 밝혀졌다.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과 함께 지붕이 날아가고 원자로에 있던 핵연료 가운데 3~4%가 공중으로 분산돼 동쪽 스칸디나비아 쪽으로 날아가 그 지역까지 오염시켰다. 벨로루시·우크라이나 등으로 퍼져나갔고, 서쪽으로는 프랑스·이탈리아까지 흩어졌다. 누출된 방사능 물질은 1945년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350배나 될 정도였다.
우크라이나 주민들은 아침이 돼서야 간밤에 체르노빌 원전에서 폭발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부의 특별한 지시가 없어 일상생활을 계속했다.
소련 정부는 이틀이 지난 4월28일에야 폭발사고를 공식 인정했다. 하지만 “체르노빌 원전에서 작은 사고가 발생해 총 31명이 사망했다”고 축소하기에 급급했다. 4월30일이 돼서야 폭발 반경 30km이내 주민들에게 대피령이 내려졌지만 이미 대부분의 주민이 방사능에 노출된 뒤였다.
1995년 발표된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태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등 3개국에서 900만명의 주민들이 직간접으로 피해를 당했다. 최소 6500명에서 3만명이 사망했고 최소한 80만명이 피폭우려자로 분류됐다.
이 사고로 소련의 원자력 발전계획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고, 유럽 전역에서 원자력발전소 건립에 대한 저항이 거세게 일어났다. 체르노빌 원전은 2000년 12월15일 영구 폐쇄됐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