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유두’···음력 6월 보름 세시풍속은?

유월 유두 풍속화

[아시아엔=편집국] 유두(流頭)는 음력 6월 보름을 말한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의 동유두목욕(東流頭沐浴)의 준말이다. 동류(東流)하는 물은 가장 양기가 왕성하다고 한다.

유두에는 맑은 개울가에 가서 머리를 감고 하루를 즐겁게 보내야 더위를 먹지 않고 즐겁지 않은 일들을 떨쳐낸다고 한다.

선비들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시원한 계곡이나 정자로 가서 풍월을 읊어가며 하루를 즐기는 걸 유두연(流頭宴)이라 했다.

유두 무렵 햇것이 나오는데 오이와 참외 잘 익은 것을 골라 따고 국수와 떡으로 사당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유두 음식으로는 유두면, 수단, 건단, 연병 등이 있다. 유두면을 먹으면 더위를 먹지 않고 장수한다고 했다.

찹쌀가루를 쪄서 손으로 비벼 새알처럼 만들어 이가 시릴 정도의 찬물에 넣고 밀수를 타서 먹는 것이 수단이며, 찬물에 넣지 않고 먹는 것은 건단이라 했다.

멥쌀로 만들기도 했다. 연병은 밀가루를 반죽해서 판 위에 놓고 밀대로 밀어 얇게 만들고 기름에 튀기거나 깨의 콩을 묻혀 꿀을 발라 먹었다.

음력 6월은 계절적으로 가장 무더우며, 삼복(三伏)이 들어 있다. 따라서 보양탕(補身湯), 삼계탕(蔘鷄湯) 같은 자양분이 많은 음식으로 몸을 보(補)하기에 노력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더위에 지쳐 발병하기 쉬운 때이므로 재액(災厄)을 면하려는 양퇴귀(禳退鬼)의 방법이 강구되었다.

그러한 대표적인 세시풍속이 유두다. 유두날에는 맑은 개울을 찾아가서 목욕하고, 특히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 것은 동쪽은 청이요,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고 믿는 데서 기인한다.

이러한 풍속을 통해 불상(不祥)을 쫓고, 여름에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믿는다. 이처럼 흐르는 물에 몸을 씻는 것은 물에 정화력이 있음을 인정하여 심신을 물에 담가 더러움을 떨쳐 버리는 세계의 보편적인 습속으로 중국의 상이계욕, 인도의 긍하침욕이 좋은 예이며, 종교적 의식에서는 불교의 관정(灌頂), 기독교의 세례(洗禮)가 모두 이러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다.

한편 유두 무렵은 새로운 과일이 나고 곡식이 여물어 가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유두의 풍속에는 조상과 농신에게 햇과일과 정갈한 음식을 차려 제를 지냄으로써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도 함께 담겨 있다.

그러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변화된 오늘날, 다양한 생산 양식에 의존함에 따라 그 풍속도 많은 변화를 보이고 있다. 유두 풍속도 예외는 아니어서 의례적인 요소는 그 전승이 단절되었으며, 물맞이 풍속은 여름 휴가철 바캉스로 대치되었다.

유두란 말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뜻으로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이란 말의 약어이다. 일부 지방에서는 이를 ‘물맞이’라고도 한다. 유두의 어원에 대해서 정확히 밝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유두를 신라 때의 이두식 표기로 보고, 이를 오늘날 유두의 다른 이름으로 쓰이는 ‘물맞이’와 관련시켜 해석하면 그 어원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즉 유두를 달리 소두(梳頭), 수두(水頭)라는 한자말로도 표기한다.

그런데 수두는 곧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이니 그 본뜻은 물말이 곧 ‘물맞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에 도 신라의 고지(故地)인 경상도 지방에서는 유두를 물맞이라고 하는데, 이로 보아 유두는 신라 때 형성된 ‘물맞이’의 풍속이 한자로 기록되는 과정에서 형성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유두의 풍속이 언제부터 유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문헌상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시대에 이미 유두 풍속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13세기 고려 희종(熙宗) 때의 학자인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金居士集)에 의하면, “동도(東都:경주)의 풍속에 6월 15일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액(厄)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고 하였다.

이외에도 유두 에 대한 기록은 <중경지>(中京志) 권2 풍속조에도 보이며, <고려사>(高麗史) 권20 명종(明宗) 15년 조에는 “6월 병인(丙寅)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와 더불어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하였는데, 나라 풍속은 이 달 15일에 동류수(東流水)에서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애며, 이 회음(會飮)을 유두연(流頭飮)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는 “경주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액막이로 모여서 술을 마시는데, 이를 유두연 (流頭宴)이라 한다. 조선의 풍속도 신라 이래의 옛 풍속으로 말미암아 유두를 속절로 삼게 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러한 문헌의 기록들을 통하여 유두는 최소한 신라시대부터, 또는 그 훨씬 이전부터 전해 내려온 우리의 풍속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최남선의 <조선상식>(朝鮮常識) 풍속 편에는 여인들의 물맞이 장소로, 서울에서는 정릉 계곡, 광주에서는 무등산의 물통폭포, 제주도에서는 한라산의 성판봉(城坂峰)폭포 등을 적합한 곳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이승만의 <풍류세시기>(風流歲時記)에는 정릉계곡 외에도 송림(松林)과 물이 좋은 악박골과 사직단이 있는 황학터(黃鶴亭:활터) 근방과 낙산 밑 등이 서울의 물맞이 장소로 좋은 곳이라고 하였다.

유두날의 가장 대표적인 풍속으로는 유두천신(流頭薦新)을 들 수 있다. 유두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이 나기 시작하는 때인데, 유두천신이란 이 날 아침 각 가정에서 유두면·상화병·연병·수단 ·건단, 그리고 피·조·벼·콩 등 여러 가지 곡식을 참외나 오이, 수박 등과 함께 사당(家廟)에 올리고 고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

이때 사당에 올리는 벼·콩·조 등을 유두벼·유두콩·유두 조라고 한다. 또한 농촌에서는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참외나 기다란 생선 등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논의 물꼬 와 밭 가운데에 차려놓고 농신에게 풍년을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그 다음에는 자기 소유의 논·밭마다 음식물을 묻음으로써 제를 마치게 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6월 월내조(月內條)에는 피·기장·벼를 종묘에 천신한다고 하였으며, <예기>(禮記) 월령(月令)에는 중하(仲夏)의 달에 농촌에서 기장을 진상하면 천자가 맛을 보고 먼저 종묘에 올리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라고 하였다.

유두는 조상신이나 농신만을 위한 날은 아니었다. 이 날 유두천신을 마친 후 일가친지들이 맑은 시내나 산간 폭포에 가서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후, 가지고 간 햇과일과 여러 가지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낸다. 이것을 유두잔치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여름철의 질병과 더위를 물리치는 액막이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믿고 있다.

또 문사(文士)들은 술과 고기, 음식을 장만하여 녹음 이 짙은 계곡이나 정자에 가서 시가를 읊으며 하루를 즐겼다. 유두 무렵이면 농가에서는 모내기를 끝내고 김매기를 할 때이다. 아울러 가을보리를 비롯한 팥·콩·조 등을 파종하며, 또 오이·호박·감자·참외·수박 등 여름 작물을 수확하기도 한다.

그래서 비교적 한가한 시기인 이 무렵에 유두라는 속절을 두어 조상과 농신에 대한 감사와 풍년의 기원을 행하고자 한 것이 바로 유두의 풍습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농사일로 바빴던 고단한 일상에서 벗어나 모처럼의 여유를 가짐으로써, 닥쳐 올 본격적인 더위를 이겨내고자 한 지혜의 결과이기도 하였다.

이 날의 음식으로는 유두면, 건단, 수단, 상화병(霜花餠) 등이 있다. 특히 유두면을 먹으면 장수하고 더위에 걸리지 않는다고 하여 누구나 먹는다. 밀가루로 만드는 유두면은 참밀의 누룩으로 만들 경우 유두국이라고도 하는데, 구슬 같은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으로 물들인 후 세 개 씩 포개어 색실에 꿰어차거나 문에 매달면 재앙을 막는다고 하였다.

우리 민족에게 국수는 긴 까닭에 장수를 뜻해서 경사가 있을 때에는 잔치 음식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었다. 오색 칠을 하는 것과 삼매(三枚)는 숫자가 기수(奇數)인 양수(陽數)라는 것과, 그것이 모두 축귀에 효과가 있는 숫자이며 대문 위에 걸어 두는 것도 잡귀가 드나드는 장소를 골라 벽사(벽邪)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도 유두면을 몸에 차거나 문설주에 걸어서 잡귀를 막는 풍속이 기록되어 있다. 수단과 건단은 쌀가루로 쪄서 길게 빚으며, 가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들어 꿀물에 담그고 얼음물을 넣어서 먹는 것은 수단이고 얼음물에 넣지 않고 먹는 것이 건단이다. 상화병은 밀가루에 물 을 붓고 반죽하여 콩가루와 깨를 섞어서 꿀물에 버무려 쪄서 먹는다.

<경도잡지>(京都雜誌) 6월 15일조에는 “분단(粉團)을 만들어 꿀물에 넣어 먹는데 이를 수단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 유두조에는 “멥쌀가루를 쪄서 긴 다리같이 만들어 둥근 떡을 만들고 잘게 썰어 구슬같이 만든다. 그것을 꿀물에 넣고 얼음에 채워서 먹으며, 제사에도 쓰는데 이것을 수단이라고 한다. 또 건단이라고 하는 것도 있는데, 그것은 물에 넣지 않은 것으로 곧 찬 음식의 종류이다. 혹 찹쌀가루로 만들기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헌 출처 <잊혀져 가는 풍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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