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2007년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언식
2007년 4월2일 오전11시 고려대장경연구소(소장 종림스님)는 한국의 수도 서울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2011년 고려대장경 천년의 해 선언식’을 개최했다. 5년 뒤인 2011년 고려 초조대장경 조성 1000주년을 미리 기리고자 열린 이날 행사에서 연구소는 2011년을 ‘고려대장경 천 년의 해’로 공식선언했다.
종림스님은 “대각국사 의천은 대장경의 편찬에 대해 ‘천년의 지혜를 정리해 천 년의 미래로 전해주는 일’이라고 했다”며 “오늘 선언식은 과거의 천년을 정리해 미래의 천년으로 전해주는 시발점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김명곤 문화관광부 장관은 “동북아 지식문화의 총결집이자 우리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의 총아인 고려대장경을 어떻게 활용하고 이해해나갈 것인가가 우리의 숙제”라며 “복원과 보존, 계승단계를 넘어 현실화, 예술화로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2011년은 팔만대장경이 아니라 고려대장경이 제작된 지 1000년이 되는 해였다. 1011년 대장경을 제작하기 시작해 1087년 초조대장경이 완성됐다. 하지만 1232년 몽골군의 고려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현재의 팔만대장경은 1236년 새로 제작에 들어가 1251년 완성된 것이다. 대장경은 역사와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자산이지만 과학적으로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세계의 인쇄술과 출판물 발전을 가져온 것이다. 습기에 뒤틀리거나 썩기 쉬운 목재로 만들어졌는데도 천년 가까운 시간동안 고스란히 보존돼 왔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팔만대장경 목판은 8만 1258판이다. 판들을 차곡차곡 쌓았을 때 높이가 약 3.2km로, 백두산(2.744km) 보다 높다. 총 무게는?280톤.
2005년 제 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2005년 4월2일 세계 가톨릭교회를 26년간 이끌어온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향년 84세를 일기로 서거했다. 파킨슨씨 병으로 고통을 받기도 했던 교황은 서거 당시에는 요로 감염에 따른 패혈성 쇼크로 심장과 신장 기능이 약화되면서 급격히 병세가 악화됐다. 서거 당일 시작된 고열로 차츰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 교황의 죽음을 지켜본 의료진들의 설명이었다.
교황은 1920년 폴란드의 바도비체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카롤 요제프 보이티와. 스무 살이 되기 전 모든 가족을 잃었다. 1964년 크라코프 대주교에 이어 1967년에는 추기경에 봉임됐고, 11년 뒤인 1978년 10월 마침내 58세의 나이로 제264대 교황에 올랐다. 455년 만에 선출된 비(非)이탈리아인 교황이자 사상 최초의 동유럽 출신 교황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교황 재위 26년 6개월 동안 지구촌을 누비며 관용과 타협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다. 서거 전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 또한 행복하십시오”라는 내용의 자필 메모를 남겼다.
1994년 11월 ‘3000년을 맞는 칙서(勅書)’를 통해 교회가 과거에 종교의 이름으로 저지른 불관용과 전체주의 정권에 의한 인간 기본권의 유린을 묵인한 것은 잘못임을 인정했다. 2001년 5월에는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의 이슬람 사원을 방문해 종교간의 갈등을 해소하는데 노력했다. 이런 선교활동 과정에서 1981년에는 이탈리아 로마 성베드로 광장에서 암살범의 공격을 받아 살해위협을 받기도 했다.
2003년 이라크 파병안 한국 국회 통과
2003년 4월2일 한국의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국군부대의 이라크전쟁 파견 동의안’을 표결로 통과시켰다. 재적의원 270명 중 한나라당 의원 145명, 민주당 96명, 자민련 10명 등 256명이 참석해 찬성 179명, 반대 68명, 기권 9명으로 가결됐다. 한나라당은 찬성 118명, 반대 22명, 기권 5명으로 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민주당은 찬성 49명, 반대 43명, 기권 4명으로 찬반 숫자가 비슷했다.
정부 제출 동의안에 여당이 야당보다 반대표를 훨씬 많이 던진 것은 드문 일이다. 이에 앞서 의료지원단만 파견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파병 동의안 수정안은 찬성 44명, 반대 198명, 기권 14명으로 부결됐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566명(특전사 소속 경계병력 60명 포함) 규모의 건설공병단(1개 대대)과 100명 규모의 의료지원단을 선발대와 본대로 나눠, 선발대는 4월 말에, 본대는 5월 중순까지 각각 현지에 파병하기로 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이날 오전 국회 국정연설을 통해 “명분을 앞세워 한·미관계를 갈등관계로 몰아가는 것보다 오랜 우호 관계와 동맹의 도리를 존중해 어려울 때 미국을 도와주고 한·미관계를 돈독히 하는 것이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훨씬 도움이 될 것”이라며 국회의 파병안 처리를 당부했다.
파병은 중동 이슬람세력의 반발을 일으켰다. 특히 2004년에는 이라크 무장단체에 납치된 가나무역 직원 김선일씨가 무참하게 피살됐다. 김씨 피살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파견 병력을 철수하지 않았다. ‘반인륜적 테러행위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일깨워야 한다’는 것이 당시 노무현 정부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한국이 이슬람 세력과 전쟁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