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제대로 알기] ‘수은’ 먹으며 ‘불로장생’ 갈망한 시황제가 남긴 ‘세계문화유산’
[아시아엔=중국을 읽어주는 중국어교사 모임] 시황제(B.C. 259~B.C.210)는 죽는 것이 두려워 평생 불로초라는 약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지요. 불로초를 찾지 못한 시황제는 자신의 무덤을 지키는 호위병인 병마용을 만들었어요. 죽어서도 자신의 권력을 나타내고,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무덤을 지키기 위해서이지요.
시황제는 왕족 자초의 아들로 이름은 영정입니다. 아버지가?조(趙)나라의 인질로 잡혀 있었다고 하니 권력이 없는 왕족이었네요. 그런데 위(衛)나라 출신 상인 여불위(B.C. 292~B.C. 235)의 계략으로 아버지가 진(秦)나라의 왕이 되었고, 3년 뒤 아버지가 죽자, 영정은 왕위에 오릅니다. 영정의 나이가 고작 13살이었을 때 일이지요. 초등학교 6학년 나이에 한 나라의 왕이 되다니 그의 인생도 평범하지 않네요.
영정은 나이도 어리고 다른 사람의 힘으로 왕이 되자 여불위의 눈치를 보며 지냅니다. 사실 자신의 엄마인 태후와 여불위는 서로 애인 관계였대요. 태후에게는 노애라는 또 한 명의 애인이 있었고요. 태후와 노애는 영정 몰래 아들을 둘이나 낳았고 노애는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지만 실패합니다. 영정은 노애를 죽이고 어머니를 유배 보냈어요. 나라에서 추방되고 쫓겨난 여불위는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진정한 힘을 가진 황제가 되기까지 영정은 험난한 인생을 살았어요. 어머니가 자신을 배신하고 그로 인해 여러 사람을 죽였으니까요. 어떤 학자는 시황제가 사람을 많이 죽여서 그토록 큰 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영정은 스스로를 대단히 여겨 왕이라는 칭호보다 더 좋은?것으로 불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칭호가 황제이지요. 그는 ‘삼황오제(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삼황과 오제를 이르는 말로, 이들로부터 중국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설화 속의 인물. 삼황은 복희씨, 신농씨, 여와씨로 신을 말하며, 오제는 황제헌원, 전욱고양, 제요방훈, 제순중화 대왕을 의미한다)’에서 ‘황(皇, 임금 황)’과 ‘제(帝, 임금 제)’ 자를 딴 후, 중국 최초의 황제이므로 ‘시(始, 처음 시)’를 붙여서 시황제라고 스스로를 불렀어요. 시황제는 기원전 230년에 한(韓)나라를 멸망시킨 뒤 10년 동안 위(魏)·초(楚)·연(燕)·조(趙)·제(齊) 나라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중국 대륙을 통일합니다. 스스로를 황제라고 부를 만큼 대단한 업적이지요.
시황제는 황제라는 권력을 이용해 만리장성, 아방궁, 자신의 무덤을 미리 만들었어요. 아방궁은 시황제가 살던 화려한 궁전인데 아쉽게도 화재로 소실되었다고 하네요. 시황제의?무덤은 중국 산시 성(陝西城)의 고도 시안(西安) 동북쪽에 있어요. 현재 발견된 것은 시황제의 무덤과 무덤을 지키는 3곳의 병마용갱이지요. 일을 하던 농부가 1932년 무덤 주변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병사 인형을 우연히 발견했답니다. 이후 4개의 인형이 추가로 발견된 뒤 특별한 발견이 없다가 1973년 우물을 파던 농부가 우연히 병사 인형의 머리를 발견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유물이 주변에서 발굴됩니다. 최초 발견자인 농부 양신만은 그 공을 인정받아 시황제릉 명예 박물관장으로 지금까지 활동 중이고요. 병마용이 그에게 평생직장을 준 셈이네요.
처음 발굴된 제1호 병마용갱은 시황제릉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어요. 무덤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가늠이 되지요? 시황제릉 제1호 병마용갱은 길이가 230m, 폭이 62m에 달하는 직사각형 모양으로, 약 6,000여 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어요. 약 2200년 동안 땅속 깊이 묻혀 있던 보물들은 40대의 전차와 무덤을 지키는 병마 인형이었지요. 병마 인형은 흙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사람의 실물 크기와 흡사합니다. 각각의 얼굴 표정이 다르고, 직위에 따라 옷과 머리 모양, 자세가 모두 달라요. 진짜 사람의 모습과 너무 흡사하여 실제 사람을 묻은 것은 아닌지 착각이 들 정도랍니다.
제2호 병마용갱은 제1호 갱에 비해 면적이 좁습니다. 장군, 병사, 마차를 끄는 기병, 말의 뼈가 발굴되었지요. 실제 말을 묻었다니 말이 불쌍하네요. 제3호 갱에서는 1, 2호 갱과 다르게 넓은 도로가 발견되었어요. 이곳에서 청동 마차가 발굴되었으니 도로는 마차가 지나가기 위한 길이었겠지요. 앞으로 더 많은 유물이 발굴될 수 있어요.
원래 병마용은 빨간색, 초록색 등으로 채색되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색은 산화되어 날아가고 황토만 남았지요. 중국 정부는 산화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더 이상의 발굴을 하지 않고 있어요. 나중에 이 문제가 해결된다면 땅속 깊이 잠자고 있는 수많은 병마용들을 화려한 색감으로 볼 수 있겠지요. 하루 빨리 병마용이 모두 발굴되어 그 위상을 느껴 보고 싶네요.
시황제는 평생 불로초를 찾을 만큼 죽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독성이 강한 수은을 먹으면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약으로 복용했다고 하네요. 그때는 수은의 해로운 점이 발견되지 않아 먹었겠지만 오히려 수은 때문에 일찍 죽었을 지도 몰라요. 전한 시대 역사가 사마천이 쓴 『사기』에는 시황제릉이 ‘수은이 흐르는 수백 개의 강이 큰 바다를 이루고 있다’고 되어 있어요.
시황제는 영원히 죽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시황제릉과 병마용을 만들었고, 이 유적지는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고 있습니다. 이렇게 병마용은 그가 죽은 뒤 천년이 훌쩍 넘은 시간까지 같은 자리에서 시황제를 지키고 있어요. 영원불멸하고 싶었던 시황제, 그가 남긴 유적들만 죽지 않고 후세에 남아 값진 유산이 되었네요.<출처=지금은 중국을 읽을 시간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