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최초 ‘수학 학사’ 유일선의 인생유전···종교지도자 친일 앞장
[아시아엔=이상구 성균관대 수학과 교수] 유일선(柳一宣, 1879~1937)은 한국인 최초의 수학 학사다. 조선 후기 선교사들에 의하여 서양 수학이 잇달아 도입되고, 갑오개혁 이후 근대식 학교들이 설립되면서 각급학교에서 수학과목을 교육했다.
초기의 수학교사는 1894년부터 성균관과 한성사범학교에서 근대수학을 가르친 이상설(李相卨)이 유명했다. 그를 이어 1895년 관비유학생으로 도쿄 게이오의숙 보통과와 ‘도쿄공수학교’(工手學校, 현재 고가쿠인대학·工?院大?)에서 채광야금을 전공하기 위해 기초수학을 배우다 1898년 귀국한 토목기사 남순희(南舜熙)가 수학교사로 이름을 떨쳤다.
남순희는 1896년 아관파천 이후에 정부지원이 끊어지자, 졸업은 못하고 1898년 중도 귀국하여, 민영환을 교장으로 1898년 11월 설립된 사립 흥화학교(興化學校)에서 수학을 가르치다, ‘의학교관제’ 반포 닷새 뒤인 1899년 3월 29일 의학교 교관으로 임명받았다. 의학교에서는 교장 지석영을 도와 의학교 설립 준비를 했고, 9월 4일 의학교 개교 뒤에는 수학도 가르쳤다. 이때부터 우리말 근대수학교과서가 발간되기 시작하였다.
이상설이 편찬한 사범학교와 중학교용 수학교과서 <산술신서>가 학부에 의하여 1900년(광무 4년) 7월 발간됐다. 또 일본 학자들이 엮은 유럽계 수학책들을 재차 편집한 <정선산학>(精選算學)이 황성신문사를 통하여 1900년 11월 발간된다.
발문 중 교열자 권재형(權在衡), 저자·편저자가 아닌 편집자가 남순희라고 되어있듯이 일본 초등학교 교재들을 조선의 학생들이 이해하기 쉽게 잘 편집한 초등수학 입문교재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지 1년도 안 된 1901년 8월 2일, 훌륭한 수학교사로 성장할 수 있었던 남순희가 요절한다.
그를 이어 초기의 탁월한 수학교육자로 인정받는 분이 유일선이다. 그는 관비유학생이 아니라 일본인 목사 도움을 받아 일본에 유학, 1904년 도쿄 물리학교(전문학교로 현재 도쿄이과대학)를 졸업하였다. 이로써 그는 ‘조선인 처음으로 수학(수물과, 이과)을 전공한 전문학교 졸업생’이 된다.
졸업 후 잠시 도쿄의 중앙기상대에서 근무하다 귀국하여 1905년 일신학교 교사(수학 및 과학)를 시작으로, 정리사(精理舍, 數理專門)라는 수리과학 출판사 및 학원(전문학교)을 경영한다. 또 한국 역사상 최초의 수학저널인 <수리학잡지>(1905.11~1906.9 통권 8권)를 창간호부터 7호까지 발행했다. 정리사는 정신과(精神科)와 이과(理科)로 교과과목이 나눠져 있었으며, 정신과에서는 심리·윤리·논리 등을, 이과에서는 수학·물리·화학 등을 지도하였다.
당시 조선 최고의 수학교사로 이름을 날린 유일선은 1906년부터 상동청년학원에서 교장 겸 산술 교사를 역임하면서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주시경(周時經, 1876~1914, 한힌샘, 白泉)과 함께 순수 한글잡지의 효시인 <가정잡지>(家庭雜誌) 발간에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관여한다.
유일선은 근대의 수학교재인 <초등산술교과서>(初等算術敎科書) 상·하(1908)를 저술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인쇄된 양장본이다. 간단한 정수의 사칙연산, 분수, 약수 등에 관하여 독학자도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하고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수학은 논리적 사고와 두뇌 단련에 유익하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유일선의 제자인 주시경은 1894년 배재학당 만국지지 특별과, 1900년 배재학당 보통과를 졸업한 후 1905년까지 외국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다 1906년 정리사(수리전문)에 입학하여 34세가 될 때까지 3년간 유일선에게 수학·물리학을 배웠다. 한편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제목의 사설로 유명한 장지연은 1908년 9월 정리사 본과(수리전문)에 입학하여 1911년 3월 졸업한다.
해방 후 1947년 서울시교육회 회장, 서울대 이사장, 조선교육연합회 회장과 제4대 서울대 총장(1949.1.4~1950.10.5)을 역임한 중동학교 수학 교사 최규동(崔奎東)은 신학문을 위해 상경해 유일선생에게 정리사에서 근대수학을 배웠다. 그는 훗날 ‘최규동’ 대신 ‘최대수’라는 별칭으로 불릴 정도로 수학에 몰두한 유일선의 수제자다. 최규동은 도쿄 물리학교를 모델로 중동학교를 수리전문학교로 만들고자 했다. 1915년 수학과 1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졸업생 중 우수학생을 선발해 수물과 전공 유학생으로 일본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일본의 전문학교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수학교사 유일선은 1908년에는 대한학회와 기호흥학회에 참가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였다. 1907년 일본어를 가르치는 관립 한성일어학교의 교관으로 부임하였고, 사립명신여학교(후에 숙명여학교)와 휘문의숙에서 교무주임과 교장을 지내는 등 귀국 초기에는 개화파 교육자로 활동했다.
수학자로 청년시절을 시작한 유일선은 한일병탄이 이루어진 후인 1911년부터 조선총독부의 일을 거들면서 수학에서는 멀어지고 종교활동에 비중을 두게 되었다. 1913년에는 일본 조합교회(組合敎會, 한국에서는 회중교회) 후원으로 다시 일본에 유학하여 ‘도시샤’(同志社) 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해 훗날 일본조합교회 ‘순회교사’가 된다. 유일선이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한 것은 일본에서 귀국한 후였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발생하자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조직된 ‘3·1운동 진정운동’에 참여했으며, 1936년 조선총독부 경기도 내무부 지방과 촉탁 발령을 마지막으로 1937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2006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06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정리한 <친일인명사전>에 교육과 종교 부문 모두 포함되었다.
유일선은 한일병탄 후 수학보다는 종교 지도자로 활동하며 친일에 앞장섰다. 1920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이 ‘반드시 처단해야 할 7적’을 꼽아서 보도했을 때 유일선도 포함되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은 “일본 조합교회 목사에게 목사직은 부업이고 본업은 조선총독부 밀정”이라고 할 정도로 경계하였다. 이런 이유로 유일선의 조선 근대수학에서의 기여는 그동안 적절한 조명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한국 근현대사는 수학 개척자들인 이상설(한학-과거합격-수학-헤이그특사-독립운동), 남순희(공무원-공학-수학-요절), 유일선(수학-종교-신학-친일)-최규동(한학-수학-교장-평양에서 옥사) 등으로 하여금 수학에 전념하지 못하도록 ‘파란만장한 역사’ 바로 그것이었다. 안타까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