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포퓰리즘-터키] 아르헨티나 페론과 터키 에르도안은 운명공동체?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포퓰리즘의 기원은 어디인가? 어떤 학자는 로마제국의 의회를, 또다른 한편에선 미국 건국 이후 확산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 흐름에서 생겨났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 둘의 공통점은 의회이다. 본래 국가운영에 국민의 뜻을 반영하자는 취지에서 출발한 의회정치는 그러나 실제로는 국민을 앞세워 자기 자신과 정파의 이익을 챙기는 정치인들에 의해 오염되는 일이 다반사다. 바로 이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매거진 N>은 아시아 각국의 정치현장에서 실제 벌어지고 있는 포퓰리즘을 살펴봤다. <매거진N> 11월호 스페셜 리포트는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이 최초 집권과 2016년 7월 쿠데타 이후 권력 강화 과정에서 그가 포퓰리즘을 어떻게 활용하고 있는지 추적했다. 또 고대로마 이후 의회정치의 산실로 불리는 이탈리아의 현재 연립내각의 ‘포퓰리즘 노하우’를 살펴본 독자들은 파키스탄, 이집트, 필리핀의 정치현실과 포퓰리즘과의 함수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IT강국으로 강력한 규범에 의해 통제되는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는 싱가포르에선 포퓰리즘이 과연 어떤 의미를 띠고 있는지 이 나라 최고 매체인 <스트레이트타임즈> 기자출신인 아이반 림 아시아기자협회 전 회장의 분석을 통해 들여다봤다. <편집자>

[아시아엔=알파고 시나씨 기자] ‘포퓰리즘’. 한자로 ‘대중주의’라고 번역되는 포퓰리즘에 관해 작성된 학술논문이 1980년대 이후로부터 늘어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국제적으로 큰 비판을 받은 포퓰리즘이 다시 전 세계의 큰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중동의 경우 이란 아흐마디네자드 전 대통령, 베네주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 같은 정치인들로 인해 포퓰리즘은 ‘대중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정치인의 개인 이익을 위한 것인가’ 하는 쟁점이 일면서 새삼 주목받고 있다. 필자 생각으로는 포퓰리즘에 대해서 부정적인 인식이 절대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이 확실하다.

특히 20세기 이후 정치권의 논쟁거리가 돼온 포퓰리즘의 기원에 대한 논쟁도 적지 있다. 일부 학자들은 포퓰리즘의 기원을 로마제국 의회에서 찾고 있는 반면 다수 학자들은 프랑스혁명 이후를 기원으로 보고 있다. 즉 19세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가 동시에 유럽에서 등장하면서 대중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는 점을 근거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포퓰리즘이 19세기 중반 이후 세계적으로 확산되며 ‘좌익’ 혹은 ‘우익’ 포퓰리즘 경향을 나타냈다고 본다.

포퓰리즘에 대해 좀더 들여다 보자. 재미있는 현상들이 발견된다. 즉 일반 대중을 대변하는 자리는 늘 비어 있었다. 법제상으로는 대중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는 곳이 의회이지만, 의회는 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시간이 오래갈수로 대중은 분노하기 시작한다. 그런 상황을 놓칠 새라 정치인들은 대중의 분노를 발판삼아 의회를 대신해 대중의 환심을 사려고 나선다.

페론 대통령과 에바 페론(왼쪽)

포퓰리즘이라고 하면 수많은 정치인이 떠오르지만, 이에 성공해 기억에 남는 사람이 아르헨티나의 후안 페론이 아닐까 싶다. 여기서 ‘성공의 의미’는 정치적 영향력의 획득을 말한다. 쿠데타 세력의 일원으로 정치판에 입문한 페론은 노조와 협력하면서 쿠데타 세력 내에서 급부상한다. 쿠데타 세력이 민정이양을 하자 페톤은 노조를 업고 대선에서 승리, 마침내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페론은 이른바 ‘페론주의’라는 이념 및 사상으로 무장한 정당을 설립하며 아르헨티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페론이 세운 정당은 페론 사망 후에도 몇 차례 대선에서 승리를 거머쥐었다.

좌익 공산주의와 우익 민족주의 사이에서 분열된 아르헨티나에서 공산주의를 원치 않는 노조들을 대변하는 자리에 위치한 페론은 제3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 그의 포퓰리즘이 그토록 오랜 동안 생명력을 유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점에서 페론은 ‘예외적인 포퓰리스트 정치인’이라고도 볼 수 있다.

포퓰리즘을 통해 역사 무대에 등장한 독일의 히틀러나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등 여느 포퓰리스트 정치인도 페론처럼 오랜 기간 정치적 행보를 이어가진 못했다. 이 대목에서 미국의 16대 에이브러험 링컨 대통령의 불후의 명언이 떠오른다. “일부 국민을 오랜 세월 속일 수는 있다. 전 국민을 잠시 속이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전 국민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의 결말이 늘 쓴맛으로 끝나는 이유는 여기서 쉽게 찾을 수 있다.

포퓰리즘에 대한 논쟁이 최근 들어 새로운 차원으로 옮겨가고 있다. 필자의 고향 터키가 논쟁의 한 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정치학자들은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이력을 살펴보면 수년간 포퓰리즘에 관한 연구주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아르헨티나의 페론보다 더 강력하게 기억에 남을 만큼 포퓰리즘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만들었다고도 본다. 에르도안의 포퓰리즘은 역사상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에르도안은 기존 포퓰리스트 정치인들과 달리 국민들에게 영합하는 발언이나 행동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또 페론처럼 군부와 노조를 동맹으로 맺어 이를 발판으로 하는 포퓰리즘에 기대지도 않았다. 종교 보수세력에 소속한 정치인으로서 에르도안은 시기 적절하게 자신을 지지해줄 다양한 정치세력과 손잡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의 포퓰리즘은 그들과 동맹을 맺으며 터키의 주도세력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어떻게 보면 에르도안의 이 방식은 ‘디바이드 앤드 룰’ 즉 ‘분할통치의 현대화된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이 통치방식은 2016년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2016년 여름 이후 좀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해 7월 15일 터키에서 발생한 쿠데타 시도가 전환점이 됐다. 그는 엄청난 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쿠데타 시도를 자신의 정권을 연장하는 매우 좋은 수단으로 매우 적절히 활용했다. 터키국민들은 그동안 수차례의 쿠데타에 의해 피로감과 분노가 쌓여있었다. 에르도안은 바로 이러한 국민감정을 이용해 ‘에르도안의 정권연장’을 ‘터키 민주주의 수호’와 일치시키며 여론몰이에 나섰다.

2016년 여름 쿠데타 이후 에르도안 정권에 대한 비판은 모조리 터키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몰아갔다. 에르도안은 이제 더 이상 새로운 동맹을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터키 민주주의의 수호자’라는 ‘숭고한 위치’에 오른 에르도안은 종전의 특정세력과의 동맹을 맺지 않고서도 홀로 스스로 국민을 대표할 수 있게 됐다.

지난 여름 경제하락이라는 또다른 문제가 그에게 발생했다. 그러나 에르도안은 이 문제 역시 ‘너무도 똑똑하게’ 해결하며 자신의 책임을 벗어났다. 애초 터키의 할크방크 메흐메트 하칸 아틸라 부사장이 미국에서 체포된 것이 발단이 됐다. 당시 미국은 할크방크(국민은행)가 대이란 경제제재조치를 위반했다는 이유로 조사 중이었다. 때마침 하칸 부사장이 미국에 갔다가 긴급체포된 것이다. 할크방크는 터키에서 유력한 은행 중에 하나로, 터키경제는 이 사건에 의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리라화가 연일 하락하는 등 불안해진 국민들은 이 사건과 관련해 에르도안 정권을 비판하려 했다. 이때 에르도안이 나섰다. “이 사건은 미국의 내정간섭이다. 미국과 이란의 관계가 나쁘다고 해서 우리나라가 이웃인 이란과의 관계를 악화시켜야 한다는 말인가? 이 문제를 따지는 사람의 미국의 앞잡이다.” 비판은 이내 가라앉았다.

에르도안의 포퓰리즘은 이제 국경까지 넘고 있다. 아직도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3년 전 터키군이 터키 상공을 비행중이던 러시아 공군기를 추락시킨 적이 있었다. 푸틴은 곧바로 터키에 대해 가스공급을 중단하는 경제제재를 가했다. 러시아의 경제제재로 경제가 악화되자, 에르도안은 “러시아 가스 필요 없다. 동물 분뇨를 태워서 겨울 난방을 하면 된다”고 했다. 이후 대미 관계 악화로 터키는 러시아와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하지만 비행기 추락사건으로 쉽지 않았다. 이번에도 에르도안은 이렇게 발언하면서 위기국면을 벗어났다. “비행기는 우리가 격추시킨 것이 아니다. 터키-러시아 관계가 굳건해지는 것을 못마땅히 여기는 세력이 추락시켰다.”

정리를 하자면, 페론의 포퓰리즘을 몇단계 업그레드 시킨 에르도안의 포퓰리즘은 큰 관심을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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