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천관우·이기백···그들의 공과를 되새겨보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사 연구에서 이병도가 차지하는 몫은 간단치 않다. 이병도는 1925년 3·1운동 후 조선총독부가 설립한 조선사편수회에서 수사관보로 일했다. 편수회는 일본, 조선 만주 등에 흩어져 있는 조선사 관련 사료를 광범위하게 모았다. 편수회의 자료 수집은 압도적이었다. 문제는 이를 조선인의 의타성, 사대성을 부각시켜 조선의 식민지화가 불가피했다는 것을 정립하는 것으로 이용했다는 점이다.
이병도의 조선사편수회 참여를 친일행적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자료에 있어서는 누구도 그를 따르지 못한다. 일본인들이 감추고자 했던 자료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국사학과는 그의 아성이었다. 그를 벗어나는 연구는 학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병도로부터 군계일학이라는 찬사를 받은 천관우의 졸업논문인 ‘반계 유형원 연구’는 실학 연구의 기념비적 성과다.
천관우는 언변, 필치, 풍모에 있어 재야의 민족사학자 박창암 장군과 같은 풍모를 지녔는데, 전두환에 의해 강청을 받자 단임을 전제로 5공에 참여했다. 박종홍 박사가 박정희 정부에 참여한 것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천관우와 더불어 쌍벽인 이기백의 <한국사신론>은 이병도의 <국사대관>에 이은 한국사 통사의 결정판이었다.
육군사관학교는 ‘해전사’에서 이방지대였다. 서울대 철학과에서 공부한 임동원이 비교사회과를 만들고 공산주의 비판 과목을 만들었다. 이병형 장군은 그를 전략과장으로 삼아 자주국방계획(율곡계획)을 만들었다. 전사과와 비사과 11~13기 교관은 육사 입교 전에 학병으로 전투해서 반공의식이 철저했고, 서울대에 위탁 교육을 들어와서는 철학과, 사학과, 정치학과에서 공부했다.
육사에는 1970년대에 미국에서 공부한 교수들이 많았다. 그들에게는 자료 접근 제한이 적었다. 생도들은 이들 교관들에게서 변증법적 유물론, 유물사관, 노동가치설, 잉여가치설, 혁명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등 공산주의 철학, 경제학, 정치학의 골격을 배웠다.
따라서 육사 출신은 1980년대 공산권이 붕괴되기 훨씬 전부터 공산주의 이론과 실제의 허구성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육사 출신이 ‘해전사’에 휩쓸리지 않은 것은 이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은 유럽을 흔들었다. 혁명을 이끌던 로베스피에르, 당통이 광포한 민중에 의해 처형되었다. 그러나 영국은 흔들리지 않았다. 절대왕정에 반기를 들어 찰스 2세를 처형한 적도 있는 영국에서 광포한 혁명은 취하는 바가 아니었다. 사변(思辨)이나 이론(理論)보다 경험(經驗)과 과학(科學)이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었다. 대륙의 합리론보다는 영국 경험론이 사회를 움직이는 바탕이 되었다. 미국, 영국 사람들은 사회를 확 뒤집는 혁명을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