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백세인’ 김옥라 건강비결은?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보건학박사,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사람의 일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만들어 진다. 이에 출생과 사망 사이의 샌드위치 레시피(recipe)를 어떻게 완성하느냐는 삶에 대한 개인의 관점과 의지에 달려 있다고 본다.
미국 작가 홀름스(Ernest Holmes, 1887-1960)는 “삶은 구상하는 사람의 생각이 삶 속에 스며들어 그 모습을 다시 보여주는 하나의 거울”이라고 했다.
인간의 소망은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이다. 통계청은 노인의 날(10월 2일)을 맞아 “작년 100세 이상 장수 어르신이 남성 550명, 여성 3358명 등 모두 3908명으로 집계됐다”고 밝혔다. 서울에는 643명이 거주한다. 이들 어르신 중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이 아닌 가정에서 건강하게 생활하는 어르신은 몇 분이나 될까?
요즘 ‘100세 시대’라고 말하지만 건강하게 100세를 맞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필자의 집안에도 아직 100세를 맞이한 가족은 없다. 지난해 별세하신 장인어른(李鍾恒 국민대 명예교수·총장 역임)은 1919년 1월생으로 지난해 1월에 99세 백수연(白壽宴)을 준비하였으나 백수연 며칠전에 세상을 떠나셨다.
필자는 최근 김옥라(金玉羅) 장로님의 백수연(百壽宴, 100th Birthday Party)에 참석하였다. 9월 27일 100세를 맞이하신 김옥라 장로님의 백수연이 그랜드힐튼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저녁 6시-9시 열렸다. 필자는 김옥라 장로께서 주일예배를 드리는 연세대학교회(Yonsei University Church) 교인으로 아내와 함께 참석하여 생신을 축하드렸다.
김옥라 박사(일본 도시샤대학 명예문화박사)는 항상 긍정적인 생활태도를 가지고 매일 기도와 성경 암송을 하며, 독서, 글쓰기, 음악 감상 등을 꾸준히 한다. 매주 연세대학교회 예배당에 지팡이 없이 걸어서 들어오시어 11시 예배를 본 후 가족들과 함께 귀가한다. 매일 아침 자택 인근에 있는 각당복지재단에 출근하여 ‘명예이사장’으로 직원들과 예배를 보고 환담을 나눈다.
삶에 대한 애정과 의욕, 그리고 풍부한 감성으로 가족, 친지, 친구들과 지속적으로 만남, 이메일, 편지 등으로 교류를 하며 정성을 다하여 ‘사랑’을 나누는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규칙적인 생활과 충분한 수면을 취하며, 잠이 안 올 때는 포도주 반잔을 마신다.
체질은 8체질의학(八體質醫學, Eight-Constitution Medicine)에서 ‘목양체질’(木陽體質, Hepatonia)로 이 체질에 맞는 음식(육류, 근채류, 견과류, 쌀, 콩, 두부, 우유, 마늘, 호박, 버섯류, 배, 사과, 장어 등)을 즐겨 먹으며, 영양제(비타민C, 청국장환 등)와 가끔 한약을 복용하고 있다.
김옥라님의 한 세기(世紀) 생애를 살펴보면,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8년 9월 27일 강원도 간성에서 기독교를 믿는 가정에서 신앙으로 자라났다. 그 당시는 일본에 의하여 조선왕조가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 즉 국권을 상실한 경술국치 후 8년째 된 해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김옥라는 보통학교 6년 내내 최우등생으로 졸업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강하여 집안일을 도우며 일본의 중고교 과정을 강의록으로 독학을 하면서 전검(專檢)이라고 불렀던 자격시험에 합격했다. 1942년 공애여자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학교장 추천으로 일본 교토(京都) 도시샤(同志社) 여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동원령(動員令)에 의해 산업현장인 해군항공창에서 일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조선의 독립이 이루어졌고,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하여 남북으로 갈라지며, 남쪽은 미국의 군정이 시작되었다. 미군정은 통역과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필요하게 되었으며, 일본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김옥라는 군정청에 취직하여 건국에 일조를 하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공무원으로 근무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영문 타이핑(打字)클래스를 지도하여 100여명의 타이피스트를 배출하였으며, 이화여대 학생들에게는 통역을 가르쳤다. 또한 외자청(外資廳)의 사무관으로 근무하면서 정부의 해외자금 유치업무도 취급했다.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면서 새로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에 공헌하였다.
미국 유학의 꿈을 안고 여권과 비자 수속을 하던 서른을 바라보던 노처녀 김옥라는 당시 무역협회에 재직한 서른이 넘은 노총각 라익진(羅翼鎭)의 구혼장을 받고 1947년에 결혼하였다. 아들 둘을 낳고 행복하게 잘 살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1·4후퇴 때 서울에서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2년 반 정도 부산 송도에서 살았다.
김옥라님은 부산에서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전쟁으로 힘들게 자라는 소녀들을 위하여 군정청에서 근무할 때 인연을 맺은 걸스카우트 운동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전국에서 몰려온 피난민 주부들에게 걸스카우트 운동을 설명하고, 서울에서 피난 온 창덕여고를 찾아가서 ‘소녀대’를 조직하고, 국민학교 여학생을 모아 ‘유녀대’도 조직하였다.
한국걸스카우트 간사장으로 15년간 재직하면서 전국 방방곡곡의 여학교들과 유대를 맺고 전쟁 후 격동기에 자라나는 소녀들에게 애국심, 자부심, 독립심을 심어주었다. 특히 한국의 걸스카우트를 국제기구의 회원으로 가입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김옥라님은 이화여대 체육대학에서 원서강독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동안 사회생활로 하지 못했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하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영어로 석사학위 논문을 쓰는 열정으로 쉰 살이 넘은 학생이 1971년 2월 졸업생 대표로 단상에 올라가 학위증을 받았으며, 이어 박사학위에 도전했다.
1967년 새로 구성된 한국교회 여성연합회 초대부회장을 시작으로, 2대회장, 그리고 1974년에는 전국연합회장을 역임했다. 1976년 세계감리교 여성대회에서 동남아시아지역 회장, 그리고 1981년에는 세계감리교여성연합회(World Federation of Methodist Women) 회장으로 피선되었다. 이에 박사과정의 모든 필수학점을 이수하고 논문만 남은 상태에서 박사학위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명에 따라 세계 회장직을 맡았다.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64개 회원국 중 50개 국가와 100여 도시를 방문하였으며, 세계감리교 여성연합회를 UN의 NGO에 가입시켰다.
1986년 아프리카 케냐에서 열린 세계대회에서 차기 회장에게 업무 인계를 하면서 5년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김옥라 회장은 그동안 세계를 위하여 일했으므로 이제는 내 나라와 민족의 복리를 위한 일을 구상했다. 남편 라익진 박사(연세대 명예경제학박사)가 출연한 기본자산으로 1986년 사회복지법인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그동안 적극적으로 외조를 한 남편이 1990년 8월 일본 동경에서 75세를 일기로 별세하여, 그 슬픔으로 인하여 거의 일년 동안 두문불출하면서 남편을 그리워했다. 이 기간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면서 탄생된 것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이며,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죽음’을 주제로 공개강좌를 열었다.
남편 故 라익진 박사(한국산업은행 총재 역임)의 아호인 ‘각당’(覺堂)을 따서 ‘사회복지법인 각당복지재단’이라는 이름으로 재정비하고 그 산하에 ‘한국자원봉사능력개발연구회’, ‘무지개호스피스연구회’, ‘삶과죽음을생각하는회’를 두고 교육과 봉사를 체계적으로 이어가고 있다. 1만명 이상이 교육을 필하고 현장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김옥라 각당복지재단 설립자 겸 이사장은 2007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훈했다. 2015년 봄에 재단 명예이사장으로 추대되었고, 막내아들(라제건)과 며느리(오혜련)가 이사장과 상임이사를 각각 맡아 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김옥라 명예이사장은 요즘도 사회활동을 하면서 집필도 계속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