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미투 사건’ 안희정·이윤택과 ‘원조 미투’ 김은애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한때 들불처럼 퍼져가던 우리나라의 ‘#Me Too운동’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 이 소용돌이의 대표적인 두 사람의 결과를 한번 살펴본다. 그 중의 한 사람은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각광받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고, ‘한국 연극계 대표 연출자’로 군림하던 이윤택 감독은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각 분야의 ‘인사권자’로서 ‘부하직원’과의 성 관련 추문에 휩싸인 두 사람 중 안 전 지사는 “합의 하에 한 것”이라 주장했고, 이윤택 전 감독은 “교육상 한 것”이라고 항변했다. 서울서부지법 형사합의 11부(재판장 조병구)는 8월 14일 안 전 지사 판결문에서 “구조화된 폐습으로서 권력형 성폭력 행위가 우리 사회에서 추방돼야 한다는 점과 이를 위한 사회적 연대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에 십분 공감한다”면서도 “헌법, 형사법적 원리에 기초해 사안을 심리해야 하고 그 결과 본 사건은 공소사실이 증명됐다고 보긴 어렵다”며 무죄 판단을 내렸다.
반대로 이윤택 전 예술감독은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30부(재판장 황병헌)에서 8월 19일 “범죄사실이 소명되고, 피의자의 지위·피해자의 수·추행의 정도와 방법 및 기간 등에 비추어 범죄가 중대하다”며 이 전 감독에게 징역 6년을 선고하고 80시간의 성폭력 치료프로그램 이수와 10년 동안의 취업제한을 명령했다.
비슷한 두 사건에 대하여 누구는 무죄이고 누구는 유죄일까? 두 사람의 혐의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은 사건이 이미 조선 정조(正祖)시대에도 있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가 지은 <은애전>(銀愛傳)에 이미 ‘조선 여인의 #Me Too’가 나온다.
정조 13년 윤 5월 27일 저녁, 전라도 강진현 탑동 마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지속적인 성추문에 시달리던 한 여인이 가해자를 직접 응징한 것이다.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불길처럼 번지는 소문을 당해낼 도리가 없었다. 18세의 김은애가 선택한 최후의 수단이 응징이었다.
김은애는 자신을 음해한 안(安) 여인을 칼로 찔러 죽인 후, 또 그 추문의 당사자였던 최정련을 죽이러 갔는데 뒤쫓아 온 어머니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관아에 나아가 자수했다. 김은애는 그동안 쌓였던 사무치는 원한을 또박또박 쏟아낸다.
“제가 시집오기 전에 이웃에 살던 최정련이 저와 간통했다는 식으로 말을 꾸며댔고, 안 여인을 중간에 내세워 청혼해왔습니다. 허락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자 그들은 추잡한 말로 더욱 심하게 음해하며 그칠 줄 몰랐습니다. (…) 저의 분함과 억울함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으니 제발 관아에서 최정련을 때려죽이어 제 한을 풀어주십시오.”
일차적인 조사를 마친 강진 현감은 “무고를 당한 사실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사람을 죽였기에 목숨으로 갚아야 한다”는 의견을 썼다. 이 사건은 전라도 관찰사의 손을 거쳐 중앙의 형조로 올라갔다. 형조에서는 “얼마나 원한이 맺혔으면 흉악한 계획을 세워 마침내 복수를 결행했겠는가? 하지만 나이 어린 여자가 목숨을 내놓고 원한을 푼 것은 법대로 처리되어야 한다”고 썼다. 이제 정조대왕의 판결만 남았다.
그런데 정조는 “은애의 옥사는 국법으로 보면 조금도 의심할 바 없으나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 원인을 따진다면 일개 옥관이 처리할 문제가 아니라”며 좌의정에게 의견을 구하도록 한다. 이에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의견을 냈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무고하게 성추문을 당한 은애가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칼을 무섭게 휘두른 것은 이해가 간다. 하지만 약법삼장(約法三章)에는 ‘사람을 죽인 자는 죽여야 한다’고 했지 정상을 참작하라는 말이 없다. 은애는 비록 사무친 원한이 있더라도 관청에 호소하여 그들의 죄를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았다.”
강진 현감에서 좌의정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을 접한 모든 사람이 은애의 상황은 이해가 되나 사람을 죽인 죄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왕의 생각은 달랐다.
“이 세상에서 가장 뼛속에 사무치는 억울함은 여자로서 음란하다는 무고를 당하는 일이다. 억울함이 골수에 사무쳐 스스로 목매거나 물에 빠져 죽음으로써 결백을 증명하는 자들이 있다고 한다. 김은애는 불과 18세밖에 안 된 여자지만 억울함이 사무쳐 한번 죽음으로써 결판내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헛되이 죽을 수 없었다. 칼을 꺼내 들고 원수의 집으로 달려가 통쾌하게 설명하고 꾸짖은 뒤 마침내 찔러 죽임으로써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으며 저 원수는 복수를 당하는 게 당연하다는 사실을 온 고을이 알도록 했다. 사람으로서 윤리와 기절(氣節)이 없는 자는 짐승과 다름이 없다. 은애의 행위는 풍속과 교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사형수 은애를 특별히 석방하라!”
김은애의 목숨을 놓고 정조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국법과 생명 사이에서 얼마나 고심했는지, 직접 쓴 판결문을 채제공에게 보이며 다시 물었다. 왕의 고뇌에 공감한 채제공은 비로소 감탄한다. 이어서 정조는 전라도 관찰사에게 “굳세고 강한 성질의 김은애가 애초에 죽이려던 최정련에게 복수하려 들 것이니, 정련을 잘 보호하라”고 명한다.
그런데 “은애를 살리려다가 최정련을 죽이게 된다면 사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뜻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살인자는 목숨으로 갚는다’는 국법을 무시하고 은애의 생명을 살려 준 대가로 범죄자 최정련을 용서하자는 판결은 이 또한 선뜻 이해가 안 된다.
정조는 김은애를 높이 평가했다. 피해자이면서 스스로를 자책하는 나약한 여자들과는 달리 용기와 기백으로 자신의 무죄를 입증했기 때문일 것이다. 심지어 왕은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면 <유협전>(游俠傳) 말미에 은애를 포함시킬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당대 문장으로 이름난 이덕무에게 이 ‘은애전’을 쓰게 한 것이다.
<은애전>은 한 인격을 수치와 분노로 치닫게 한 자는 응분의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는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법적으로 죄가 있든 없던 한 여인에게 한(恨)을 심어준다면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 과보를 결코 면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