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과 유머의 만남’ 김택수 작곡가···”찹, 싸알 떠억! 메, 미일~무욱!”
“재미동포들 삶 담은 오페라·발레 음악에 도전할 것”
[아시아엔=나경태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2013년 2월 인디애나대학 콘서트홀. 스산한 바람소리가 이어지다 푸른 눈, 금발머리 성악가의 묵직한 목소리로 뜻밖의 노랫말이 흘러나온다.
“찹, 싸알~ 떠억! 메, 미일~ 무욱!”
외국인 청중은 어떨지 모르지만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라’ 미소 짓게 된다. 이어 혼성합창단의 화음과 단출한 악기 소리 한두 개가 가미되면 ‘어라’가 ‘오’로 바뀌면서 색다른 서양음악에 빠져든다.
작곡가 김택수씨의 곡 ‘찹쌀떡’이 초연되던 순간이다. 그는 지난 3월 한국에서 ‘국민학교 환상곡’을 발표했다. 미국에서 창작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그를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그는 “일본의 어느 학자는 서양음악을 엄숙하게 받아들이는 인식에 대해 낭만주의 작곡가들을 신격화한 결과라고 주장한다”며 “사실 서양음악에서 위트는 굉장히 오랜 역사를 갖고 있어 모차르트 오페라나 하이든 교향곡에도 유머러스한 요소가 많다”고 했다. 김씨는 “그분들 후대의 수많은 작곡가들도 냉소·풍자·반전 등의 요소를 가미해 다양한 웃음을 선사해왔다”며 “이러한 유머가 내 음악의 특성이라는 점을 깨닫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전개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최신작 ‘국민학교 환상곡’에는 국민체조의 구령과 배경음악,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의 가락 등 한국인에게 친숙한 멜로디들이 녹아있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듯 낮게 깔린 현악기 연주 위에 통통 튀는 나팔소리로 ‘무슨 꽃을 찾으러 왔느냐 왔느냐’의 가락을 버무려 웃음을 자아낸다.
그러나 그저 웃고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 나란히’, ‘차렷’ 등 ‘국민학교 환상곡’에 삽입된 구령에선 전체주의적 뉘앙스가 짙게 묻어나고 ‘찹쌀떡’에는 추운 겨울밤 거리를 배회하는 떡장수의 신산한 삶과 배고픔 때문에 그 목소리에 귀 기울였던 김 작곡가의 기억이 담겨있다.
그는 “내 음악의 소재는 일상성에 기반하고 있다”며 “(서울대) 화학과 재학시절 읽었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집 ‘평범한 것들에의 송가’의 영향이 컸다”고 했다. 김 작곡가는 “음악이 귓가에 맴돌지만 작업은 지지부진한 채 밤새 뒤척이는 작곡가의 고민을 담아 ‘불안의 토카타’를 지었고, 다니는 헬스장에서 우연히 농구공 튕기는 소리를 듣고 ‘바운스’를 작곡했다”고 말한다.
그는 특히 “한 개인의 일상은 그가 속한 집단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정치·사회적인 분위기 또한 간접적으로 담기게 되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화학도서 음악가로···조수미·임헌정 등과 협업도
김 작곡가는 음악에 담긴 유머가 행여 자신을 가벼운 작곡가로 인식시킬까 염려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한다. 2016년 ‘숨’에선 인공지능 작곡가에 대항해 컴퓨터 알고리즘을 활용한 작곡법을, 2015년 ‘아카데믹 리추얼-오르고 또 오르면’에선 문묘제례악을 소재로 국악 작곡에 도전했다. 2017년 ‘이상의 시에 의한 5개의 가곡’에선 이상이 생전 들었을 법한 트로트 요소를 활용하기도 했다.
그는 2008년 조수미 음반 ‘Missing you’에 편곡가로 참여하면서 직업적 경력을 쌓기 시작, 2012년 진은숙 작곡가 추천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해외무대에 데뷔했다. 최근까지 상주 작곡가로 있던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를 통해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있던 임헌정 작곡가와도 일했다. 그는 서울대 화학과 재학시절(1999~2005)엔 임헌정 작곡가의 지휘법 수업을 수강했다고 한다.
뼛속까지 음악인으로 살고 있다는 김 작곡가는 네살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열살부터 바이올린을 공부하는 등 일찍부터 음악에 눈을 떴다. 하지만 가정형편 때문에 음악 대신 일반 학업을 선택했다고 한다. 고등학생 땐 국제화학올림피아드에 한국대표로 참가해 은메달을 받은 과학영재다.
그는 “그런데 화학은 좋아해도 책을 덮으면 생각나지 않는데 비해 음악은 항상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화학과 졸업 후 서울대 작곡과에 학사 편입, 서울대대학원에서 음악과 석사학위, 미 인디애나대에서 작곡과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포틀랜드주립대와 루이스앤클락대에 겸임교수로 재직 중이다.
“처음 작곡을 시작한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화학과 학생일 때도 서울대 ‘예수전도단’ 동아리 대표이자 밴드마스터로 활동했고, 이 팀의 활동이 프로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땐 MIDI 프로그램으로 가요를 편·작곡하고, 고등학생 땐 틈틈이 음악 받아쓰기를 했다. 내 삶의 중심엔 항상 음악이 있었다. 재미동포들의 삶을 담은 음악과 오페라·발레 음악 작곡에도 도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