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국민술 ‘보드카’···”보드카 많이 마시면 영혼이 빠져 나간다”
보드카 정말 좋은 술인가?
[아시아엔=남현호 <러시아, 부활을 꿈꾸다> 저자] “보드카 많이 마시면 영혼이 빠져 나간다”
모스크바 지하철 역 입구에서 볼 수 있는 광고 문구다. 러시아인들이 술을 많이 마신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광고다.
러시아는 세계 최대 음주량을 자랑한다. 1인당 연평균 술 소비량은 18리터(2009년 기준). 미국인들보다 거의 두 배 정도 더 술을 마시는 셈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1인당 연평균 술 소비량이 8리터 이상이면 인간수명과 건강에 위험한 수준으로 보고 있다. 아침 출근길 도로를 지나다 보면 맥주병과 보드카 병을 들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러시아는 매년 2만3천명 이상이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하고 7만5천명 이상이 간암 등 지나친 음주와 관련된 질병으로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알코올 중독자는 약 25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심지어 돈이 없는 러시아 술꾼들은 면도 후 바르는 에프터쉐이브나 향수 오드콜로뉴, 세정제까지 마셔 목숨을 잃어 신문 지상에 오르내리기도 한다.
러시아 술 시장 규모는 520억달러로 세계 최고수준이다. 맥주는 술 축에도 끼지 못한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인구가 계속 줄고 평균 수명이 늘지 않는 이유도 술 때문으로 보고 있다. 의학 전문지 <랜싯>(Lancet)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 매년 15~54세 사망 원인 중 절반이 음주 때문이라고 발표했다.
러시아 여성 평균 수명이 72세인 반면 남성의 평균 수명이 59세인 것도 같은 이유다. 오죽했으면 메드베데프 전 대통령은 알코올 중독을 국가적 재난으로까지 규정했다. 그는 “그렇게 힘들다는 1990년대보다 오늘날 술을 더 많이 마신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술의 양도 문제지만 시중에 판매되는 술의 70%이상이 알코올 도수가 40도가 넘는 보드카 종류의 독주라는 것이다. 한 서양인은 보드카에 대해 “러시아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윤활유이자 도피 장치다. 러시아인은 삶의 무료함을 지워 버리기 위해, 추운 겨울날 몸을 덥히기 위해, 그리고 술이 주는 현실도피를 간절히 부둥켜안기 위해 마신다”라고 말했다.
보드카는 옥수수와 감자를 발효, 증류해 만든 술로 무색, 무미, 무취가 특징이다. 보드카(vodka) 어원은 물(水)에 해당하는 러시아어 ‘바다’(вод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민간에서 치료제로 사용했다.
12세기 길고 추운 겨울밤을 달래기 위해 제조된 것이 러시아혁명 이후 망명한 러시아인들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그 기원을 두고는 설이 분분하다.
보드카는 북유럽부터 베링해협에 이르기까지 유라시아 대륙 북부지역에 다양하게 분포하고 있으며 자기들이 서로 원조라고 주장한다. 러시아에 보드카가 언제 어떻게 들어왔는지 정확하지 않지만 1400년대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들어왔다는 설이 주를 이룬다.
과거 러시아에는 벌꿀 술인 ‘메다부하’라는 토속주가 있다. 모스크바 공국의 바실리공은 메다부하를 보호하려고 보드카 판매금지령을 내렸고 이 때문에 보드카는 밀주로 성행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다가 이반그로즈니 황제가 보드카를 인정했고 공식 보드카 판매점을 개설하도록 허용했다. 황제의 전유물이던 보드카는 17세기 후반 일반 민중들 사이에 퍼졌다.
표트르 대제 때 보드카를 제1의 국고 수입원으로 만들려고 국가독점권을 선포했고 국영 양조장을 설립하고 전매제를 도입했다. 소비에트 공산정권도 보드카 판매에 따른 수입을 중요한 국고 수입원으로 삼았다. 1917년 사회주의혁명 직후 공산당은 보드카 생산 시설을 국유화하고 제조를 금지했다. 보드카를 종교에 버금가는 자본주의적 병폐라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가정에서 몰래 만드는 밀조 보드카인 사모곤(Samogon)이 성행하고 세수가 부족해지자 스탈린은 1930년대 말부터 보드카 생산 재개를 승인했다.
보드카 맛에 한번 빠지면 헤어나지 못한다. 도수는 강하지만 숙취가 적다. 물론 폭탄주로 마시면 상당한 타격이 가해지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보드카는 아주 차갑게 마셔야 제 맛이다. 한때 보드카 알코올 도수는 56도였다고 한다. 지금의 40도가 된 것은 화학 원소 주기율표를 만든 화학자 드미트리 멘델레예프(1834-1907)가 1865년 `알코올과 물의 합성에 관해서´라는 논문에서 알코올이 40도에서 가장 안정적인 분자구조를 유지한다는 내용을 발표한 것이 인연이 됐다고 한다. 인간의 몸에 취하지 않고 적당한 취기를 느낄 수 있는 알코올 도수를 연구하던 끝에 40도가 가장 적절하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실제 보드카 도수는 39.8도라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40도의 정화된, 그리고 이삼일 꽁꽁 냉동 보관된 보드카(진짜 보드카는 1년간 냉동 보관해도 절대 얼지 않는다)의 첫잔을 ‘다드나’(영어의 Bottoms up)라고 외치고는 한 방울도 남김없이 모두 마셔 버린다. 물론 보드카 잔 종류도 다양한데 보통 ‘륨카’라고 불리는 우리의 소주잔 크기 정도가 대세다. 술을 따를 때는 술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채 따르는 것이 전통이다.
러시아에도 폭탄주가 있다. 맥주를 양주나 소주에 섞는 것이 아니라 역시 국민주 보드카를 맥주와 섞어 마시는 ‘요르쉬’(Yorsh)가 있다. 원래 요르쉬는 농어류의 작은 민물고기를 말한다. 이 물고기는 가시가 많아 주의해야 하는데 맥주와 보드카를 섞으면 이 물고기처럼 독해지니 주의해야 한다는 의미로 폭탄주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맥주 대 보드카 비율은 4대1이 내지 5대1이다.
보드카는 흑빵, 캐비아, 청어 절임, ‘살로’라고 불리는 돼지비게 훈제 등과 함께 마시면 궁합이 맞다. 러시아의 3대 명물로 흑해산 캐비아, 칼라시니코프의 소총, 그리고 보드카가 꼽히는 것만 봐도 러시아인들의 보드카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한다.
러시아 현지에서 판매되는 보드카 종류는 수십 가지, 가격도 다양하다. 보드카는 가격이 싸서 가짜로 만들려 해도 원가를 건지기 어렵기 때문에 가짜가 없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보드카의 60%가 가짜라는 말도 있다. 때문에 정확한 과학적 근거는 없지만 자신이 마시는 보드카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감별하는 방법까지 나올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