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 전신 ‘보안사’ 12·12 ‘쿠데타의 추억’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장관들에게 “대면보고가 꼭 필요해요?”라고 물었다. 이것이 국정수행에 대한 박근혜의 수준과 실력이다.
촛불을 진압하기 위해서 계엄령이 선포된다면 이것은 박정희의 10월유신과 같은 친위 쿠데타다. 박근혜가 쫓겨난 것은 20여명의 여당의원이 탄핵 의결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어떻게 돌파하느냐를 최순실에 물어볼 것인가? 민비나 서태후가 그리 흔한가?
계엄이 국회에서 통과되더라도 계엄령 하에서 한국경제와 사회는 거의 마비된다. 박정희가 이룩한 산업화와 1979년 시민혁명으로 이룩한 민주화는 치명적 손상을 입는다. 좋아할 것은 중국, 일본밖에 없다. 이를 무릅쓸 것인가?
12·12는 전두환의 쿠데타다. 보안사령관이 합수본부장으로서 참모총장을 조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대통령 재가가 필요하다. 이 정도는 전두환도 알았다. 그래서 대통령 재가를 얻으려 했다. 그런데 최규하는 국방장관을 데려오라고 했다. 절차상 이것도 맞다. 최규하가 버티는 동안에 당연히 재가가 떨어질 줄 알고 행동한 합수부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군사정변이 되어버렸다.
경복궁에 모여 있던 신군부는 일이 묘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부대로 돌아가서 부대를 끌고 나왔다. 여기서부터는 쿠데타다. 참모총장이 유고인 상황에서 참모차장이 3군사령관과 함께 수습에 나섰다. 황영시 군단장과 노태우 사단장이 경복궁에 있는 상황에서 3군사령관이 9사단 참모장에 병력출동 금지를 명령했으나 이들은 명령을 듣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군의 생명인 상명하복이 무너졌다.
전두환이 병력을 동원한 것은 보안사령관으로서가 아니었다. 보안사 본부대 병력은 전력이 아니다. 고위급 사령부가 모두 그러하지만 육군본부는 실전 병력이 없다. 5·16때 장도영의 만류에도 박정희가 병력 동원을 강행하자 장도영 참모총장은 헌병 1개 소대로 바리케이트를 쳤을 뿐이다. 방어는 순식간에 돌파되었다. 전두환의 보안사도 병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전두환이 동원한 것은 하나회 사조직이었다. 이런 배경에서 12·12 쿠데타가 성공한 것이다.
박근혜의 친위 쿠데타는 애초 가능성이 없었다. 촛불시위에 참가한 시민들이 탱크에 겁을 먹을 것인가? 그들은 군이 함부로 총을 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광주사태에 덴 것이다. 1989년 천안문사태를 진압하기 위해 등소평은 발포를 명령했다. 이 점에서 등소평은 비판 받는다.
강택민은 ‘공 7, 과 3’으로 이를 정리했다. 소련에서 쿠데타가 일어났으나 옐친은 민중의 힘으로 제압했다. 국민 저항에 놀란 쿠데타군이 진압을 포기했다. 이것이 역사다.
이러한 역사는 국민도, 군도 모두가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