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0항쟁 당시 계엄령선포 막은 민병돈 특전사령관 “쿠데타는 절대 안된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의 마지막 계엄령은 1980년이었다. 송영무 국방장관은 해군출신이다. 중앙에서 주로 육군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엄령에 대해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합참이 계엄실무편람을 계속 보완한다고 하나, 지금 군의 수뇌부 대부분은 계엄령을 겪어보지 못했다. 1970년대 유신체제로 인해 위수령과 계엄령에 무시로 동원되었던 65세 이상의 선배들이 보면 이들은 행운아다.
1990년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이 보수파의 쿠데타를 만났다. 고르바초프는 크리미아에 연금되고 옐친이 민중의 힘으로 쿠데타를 진압했다. 정권은 고르바초프에서 옐친으로 넘어갔고 소련 연방은 해체되었다. 이것을 계기로 중남미와 터키, 태국 등 역사적으로 군의 역할이 강조되는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쿠데타로 정권을 잡는 행태는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이동통신을 통해 군의 소식은 순식간에 퍼져 나간다. 젊은 병사들은 장교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군의 기본인 상명하복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따라서 군은 어떤 경우에도 쿠데타를 도모해서는 안 된다. 민중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고자 하면 광주사태가 재현된다.
1987년 6·10시민항쟁이 계엄령 선포로 끝나지 않고 6·29 선언으로 수습된 것은 여러 요소가 작용했지만, 특기할 것은 특전사령관 민병돈의 역할이다. 민병돈은 전두환과의 인연도 각별하였지만, 명성황후 집안으로서의 자부심과 독일 육군대학에서의 공부로 군인본령에 대한 의식이 투철했다. 전두환도 병력을 출동시킬 특전사령관이 반대한다면 할 수 없다며 뜻을 꺾었다. 이 결심은 민병돈 혼자만의 판단이 아니었다. 당시 군에서는 전방부대와 수방사, 특전사 영관 장교 사이에 치열한 사발통신이 오갔다. 즉 軍心이었다. 그들의 판단이 민병돈 장군에 모아진 것이었다.
이들 판단에 큰 영향을 준 것은 1980년 광주사태였다. 군이 다시는 민간의 분란에 개입되는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아야겠다는 각성이 6·29로 나타난 것이다. 6·29를 전두환이 주도했느니 노태우가 주도했느니 하는 것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오늘날 언론은 민주화의 공을 모두 김영삼과 김대중에 돌리지만, 이는 역사를 제대로 읽지 못한 단견이다.
송영무 등 군 수뇌는 당시 선배들이 겪은 고뇌를 모른다. 6·29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오늘의 한국국민은 1987년 이후에 출생한 세대가 다수다. 그러나 태극기집회에 나오는 노병들은 1980년 광주사태와 1987년 시민항쟁의 현장을 보았다.
반복하지만, 군은 어떤 경우에도 쿠데타를 도모해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