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설의 클래식] 자살 대신 자연을 택하게 해준 나의 은인 ‘에밀’
“이제 자살 대신 자연으로 도망치자”···울며 읽은 루소의 ‘에밀’
[아시아엔=박상설 <아시아엔> ‘사람과 자연’ 전문기자] 죽어야 끝날 고통, 너무나도 절박했다. 밥벌이의 지겨움을 견디다 못해 노끈을 늘 허리에 감고 자살하자,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짓이지만 그때는 그랬다.
나는 24살 나던 6.25전쟁 때 법무사를 하던 아버지의 직업이 끊겨 부모와 여동생 일곱명을 먹여 살려야 했다. 곧이어 내 자녀도 세명이나 생겨나 처를 합하여 열한명의 대식구로 늘어났다. 세 사람의 식구도 먹여 살리기 어려운 애송이가 열한명이라니? 바로 생지옥에 빠진 것이다.
생지옥에서 도망치려고 항상 몸부림쳤다. 죽는 길 외는 딴 방도가 없었다. 죽으려고 산을 헤매다보니 산이 피난처가 됐다. 돈은 없고 도망은 쳐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서 자연스레 단골이 된 발길은 세상에서 제일 처참한 화전민 감옥이었다.
그들과 한패거리가 될 때 나는 살아났다. 천덕꾸러기로 버려진 곳,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그들 곁에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왠지 힘이 되었다.
그때도 화전민이 더러 있었다. 그들에겐 가난은 일상이었다. 당장 저녁 끼니조차 없는 극빈한 삶이었다. 그 거지소굴에 잠시나마 같이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허무나 좌절, 번민 따위를 잊게 되고, 가족마저 뒷전이 됐다. 결국 ‘원수 덩어리’로 여겼던 가족이 나를 살렸다.
내 누님은 일제 강점기 일본어 책인 <세계문학전집> 고전을 끼고 살았다. 덕분에 내 나이 17세때 <에밀>(Emile, ou de L’education)을 접하며 수박겉핥기로 읽었지만 “자연으로 돌아가자”, “인간은 인습이라는 사슬에 묶여있다”는 두 잠언이 나에게 각인되었다. 나는 그 이후 이 책을 반복해 읽으며 삶의 나침반으로 삼았다.
에밀은 책 속 주인공 이름이며 그의 출생에서 성년에 이르기까지의 성장과정을 서사시적 사랑의 행복으로 인도하는 교육문학 소설이다. ‘에밀’은 루소가 의도한 대로 자연에 사는 평범한 농민의 이야기 줄거리로 맺는다.
루소는 나에게 무엇인가? 그의 에밀은 나의 사상적 뿌리가 됐다. 그리고 나의 주말농원으로 되살아난 고전이 바로 에밀이다.
내가 39세부터 51년간을 이어오며 죽는 날까지 주말레저농원에서 땀 흘려 일하며 책 읽고 산에 가게 된 사상적 뿌리가 ‘에밀’이다. 루소의 책들로부터 받은 위안은 단순한 기분전환의 것이 아니라, 텐트와 호롱불빛 아래 고독을 즐기는 자유다. 홀로 샘골의 숲을 쉬엄쉬엄 거닐 때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그지없는 자연인으로 나마저 한 그루의 나무가 된 느낌이다.
‘에밀’과 떠나는 샘골 小國, 나는 왜 도시민을 마다하고 주말농사꾼이 되었나? 나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야영하며, 농사일 하며, 산에 가는 산 꾼’이다. 나는 30대 젊은 나이부터 루소의 자연주의적 삶에 푹 빠져들어 그의 에밀을 늘 보물처럼 가까이 했다.
틀에 박힌 일상생활로부터 훌쩍 벗어나 아무데서나 책을 펼쳐들고 생각하는 동안 가슴에 새록새록 자유와 평화의 물결이 밀려오는 그런 야지의 삶을 나는 최고로 삼는다.
어린자녀와 같이 나온 부모들, 책을 펴들고 진지하게 빠져든 젊은이들, 돋보기 안경을 끼고 고전을 돌아보는 노인…. 그들은 행복해 보였다. 나도 그들 틈에 끼어 책 홍수 속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한나절을 대형서점에서 보냈다.
책 한권 들고 떠나는 휴가. 세상에서 가장 낮은 곳,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산골이 바로 나의 터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책을 잘 안 읽는다고 한다. 어느 통계에 의하면 일년 동안 책 한권도 안 읽는 사람이 25%나 된다고 한다.
올여름 휴가는 무엇으로 지내나?
책 한권 들고 떠나는 휴가, 책의 세계로 떠나는 미지의 세계, 벌써부터 가슴 설렌다. 추천하는 책은 1762년 발간된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의 두툼한 古典 <에밀>이다. 스마트폰에 넋을 잃은 요즘 사람들에게 잘 먹혀들지 모르겠으나 무더운 여름날 계곡 물에 발 담그고 삼매경에 빠져들어 보자.
루소는 칸트, 괴테와 교류하며 18세기 초부터 계몽주의 문학사상 부흥에 큰 획을 남긴 대문호다. 그의 불휘(不諱)의 古典으로는 <사회계약론>, <인간 불평등의 기원>, <고백론>, <학예론>,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에밀> 등이 있다.
한번쯤은 읽고 싶었던, 그러나 선뜻 손을 못 댄 아쉬운 책. 당신은 지금 250년 전의 루소와 마주하고 영혼의 뜨락에 늘 푸른 사색의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에밀’은 루소의 저작 중 가장 뛰어난 핵심사상이 담겨있다. ‘자연’에 의한 ‘자연인’을 길러내는 인생역정을 서술한 교육서이며 시공을 뛰어넘는 문학작품이다. 교육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평생교육을 어느 곳에서나 이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교육은 자연과 사물과 인간에 의해 자유스런 흐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한정된 장소와 기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교육은 부모나 교사·학자들의 전문지식인만이 하는 점유물이 아닌 전인교육을 강조했다. 모든 것으로부터 배우는 만인아사(萬人我師)다. 요즘 같이 학교나 학원 세미나 등에서 지식과 기능 위주의 암기식 주입교육이 아니라 人性교육을 최고 가치로 삼는다.
이 책은 루소 당시에는 도처에서 큰 물의를 일으키며 금서처분을 당했다. 루소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48세 때인 1762년 쉬이스베르느공화국으로 도망쳤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독자 대중의 열광과 찬동은 한 시대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에 영향받은 사람들이 우유대신 모유를 먹이고, 전원생활이 넓게 퍼져 나아갔다.
왜 이런 교육이 필요한가? 궁극 목표는 기계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게 아니라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인습에 매몰되지 않는 자연인간을 길러 내는 숭고한 인생의 안내서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행복의 세계를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을, 우리가 스승을 찾아 나서는 게 아니라 스승이 우리를 기다려주고, 스승이 우리를 찾아내주는…. 이것이 ‘에밀’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어디로 향해 가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니 불확실한 미래를 막연히 가려고 하지 말고 루소의 가르침을 받아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를 알고 우리는 가야한다. 자연은 만인의 학교이며 놀이터다.
필자에게 인상적인 대목을 인용한다.
산다는 것, 이것은 숨 쉬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활동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기관과 감각과 능력 등 우리들에게 생존해 있다는 의식을 부여하는 인간의 모든 부분을 활용하는 것이다. 가장 많이 산 사람이란 가장 많은 연륜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삶의 보람을 가장 많이 느낀 사람이라는 뜻이다.
우리의 지혜는 모두 다 노예적 편견으로 되어있다. 우리의 모든 습관은 굴종과 고문의 구속 물에 불과하다. 시민적인 인간은 노예적인 상태에서 태어나고 살고 또 죽는 것이다. 태어나자마자 인간은 배내옷 속에 꿰매듯이 감싸여지고, 또 죽으면 못질한 관 속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한 인간은 인습이라는 사슬에 묶여 있다.
모든 것은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선하나 인간의 손에 들어오면 타락한다. 인간은 어떤 땅에 다른 땅의 산물을 재배하려 하고, 또 어떤 나무에 다른 나무의 열매를 맺게 하려 애쓴다. 인간은 기후와 환경과 계절을 뒤섞어 혼동을 시켜 버린다. 인간은 개나 말이나 노예를 불구로 만든다. 인간은 모든 것을 뒤집어 엎고 모든 것을 일그러 뜨리고, 기형과 괴물들을 좋아한다.
다음은 이 책 말미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