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CCTV ‘강교전투 영웅’ 이범석 장군 ‘항일투장 명장’ 선정
[아시아엔=박남수 철기이범석기념사업회 이사장, 전 육사교장] 1931년 발생한 만주사변은 동북아 정세를 급변시켰다. 중국군이 일제에 맞서 일어나자 만주지역에서 때를 기다리던 한국의 무장투쟁 독립군도 투쟁 기회를 맞은 것이다. 외몽골 지역에 은거해 있던 철기 이범석은 중국군관학교를 나온 경력과 청산리전투의 명성으로 일제 관동군과 최전선에서 싸우던 흑룡강성의 소병문, 마점산 군대에 초빙됐다.
철기는 보병간부를 선발, 개조장갑화차의 전술적 운용을 가르쳐 관동군에 대응하게 했다. 철기 이범석은 넨즈산 탈환작전시 개조장갑화차를 이용하여 대성공을 거뒀다. 이에 당시 흑룡강성 주석이자 최고사령관이던 마점산 장군이 치치하얼에서부터 직접 달려와 철기를 격찬했다. 이 개조장갑화차는 일본군 진격을 저지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국인의 우수성을 만주땅에 드날린 것이다.
철기는 “창의는 새로운 것을 만드는 것과 함께 있는 것을 새롭게 쓰는 것도 창의”라고 했다.
철기의 개조장갑화차에 깊은 인상을 받은 마점산 장군이 철기를 초빙했다. 증국 신식군관학교인 보정군관학교 출신이던 소병문 장군과 달리 마점산 장군은 마적 출신이었다. 작은 키의 마점산은 ‘만주의 나폴레옹’으로 불렸다. 군사지식은 높지 않았으나 지도력이 뛰어났다. 철기는 마점산의 핵심참모인 작전과정이 된다.
마점산 장군은 중국 최초의 대규모 항일 승리전투인 ‘강교전투’ 영웅으로 일컬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동북군벌 장군들이 친일로 돌아서 일제에 야합하거나 장개석 지시로 산해관 이남으로 전투없이 철수할 때 마점산 장군은 흑룡강성에서 항일에 앞장섰다. 마점산의 핵심참모로 철기가 뽑힌 것이다.
‘강교전투’란 1931년 11월 일제 관동군의 흑룡강성 성도 치치하얼 점령이 중국군에 의해 저지된 전투를 말한다. 3만여명의 일제 관동군과 1만3천여명의 중국 흑룡강성군이 37일간 혈전을 치렀다. 결과적으로 일제 관동군이 1만여명의 사상자를 남기고 후퇴했다. 중국군이 대승을 거둔 전투다.
강교전투에서 철기는 두가지 일화로 중국인들에게 유명했다. 하나는 강교전투 중에서도 결정적 전투인 11월 17일 삼칸방 방어전투에서다. 당시 철기의 고려혁명군 결사대 잔여병력은 불굴의 진지사수로 중국인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또 하나는 당시 흑룡강성군이 일제 관동군의 장갑차 공격에 제대로 대웅하지 못해 일방적으로 밀릴 때였다. 철기는 “장갑차의 급소는 포탑 회전부”라며 포탑 회전부에 철공구 등 쇠붙이를 끼워 포탑을 돌지 못하게 한 후 적을 공격토록 중국측에 제안했다. 중국군은 철기의 제언을 받아 들여 이를 실전에 적용, 큰 성과를 냈다.
치치하얼 소재 ‘강교항일전투기념관’에 보면 철기 이범석 장군은 ‘용감하며 지모가 넘치는 장군’으로 소개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