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 클리닝’···당신이 내일 죽는다면?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만일 우리가 내일 죽는다면 어찌하면 좋을까? 이 세상 오는 데는 순서가 있지만, 떠날 때는 순서가 없는 법이다. 그래서 스웨덴 사람들은 ‘데스클리닝’이라는 걸 한다고 한다. 이 말의 뜻은 죽음을 앞두고 있는 사람들의 주변 정리라고 한다. 그런데 꼭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만 이 ‘데스클리닝’이 필요할까? 아니다. 죽음을 앞두고 있지 않더라도 한번쯤 죽음을 가정하고 주위를 정돈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지난 겨울 극장가의 승자는 <신과 함께―죄와 벌> 그리고 애니메이션 <코코>였다. 각각 1440만, 343만 관객을 동원했다. 둘 다 죽음과 사후(死後) 세계를 다뤘다. 웹툰 <죽음에 관하여>는 조회수 1위로 연재를 마쳤다가 독자들의 요청으로 재연재를 시작했다. 출판계에서도 <어떻게 죽을 것인가> <숨결이 바람 될 때>에 이어 서울대병원 허대석 교수가 펴낸 <우리의 죽음이 삶이 되려면>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이 얘기는 “개똥밭을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삶에 강한 애착을 보였던 우리 사회에서 죽음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증거다. 영국의 <가디언지>는 최근 “출생이나 결혼처럼 죽음도 개인 취향에 따라 계획하는 유행이 생겼다”고 보도했다.

필리프 아리에스가 쓴 <죽음의 역사>에 따르면 죽음을 금기시하게 된 건 20세기 초 급격한 산업사회에 돌입한 미국에서 시작했다. 왜냐하면 풍요에 대한 열망이 커질수록 삶은 칭송받고, 죽음은 저주받기 때문이다. 사회에서 죽음을 기피하니 사람들은 집이 아닌 병원에서 홀로 죽기를 바라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도 병원 내 임종 비율이 70% 이상으로 세계 최고수준이다. 이런 현상은 죽음에 대한 태도가 변화한 것으로 고령화와 연관이 있다. 일본에서도 죽음을 준비하는 문화 ‘종활’(終活, 슈카쓰)이 이미 10조원대 산업으로 성장했다고 NHK가 보도했다. 배우자나 자식 없이 노후를 보내는 노인이 많아진 것도 한 이유다.

북미와 유럽에서 인기를 끈 책 <The Art of Swedish Death Cleaning>(내가 내일 죽는다면)에 따르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오히려 삶에 활기를 준다고 말한다. 이렇게 ‘데스 클리닝’이란 죽음을 대비해 살면서 미리미리 물건을 버리거나 기부하는 것을 말한다.

원불교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대종경>(大宗經) ‘천도품’(薦度品)에서 죽음에 대한 법문을 내렸다. “범상한 사람들은 현세에 사는 것만 큰 일로 알지마는, 지각이 열린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크게 아나니, 그는 다름이 아니라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나서 잘 살 수 있으며, 잘 나서 잘 사는 사람이라야 잘 죽을 수 있다는 내역과,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이치를 알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조만(早晩)이 따로 없지마는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 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

그렇다면 나이 40이 넘어 생사를 연마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첫째, 착심 두는 곳 없이 걸림 없는 마음을 늘 길들여야 할 것이다.

둘째, 생사가 거래인 줄 알아서 늘 생사를 초월하는 마음을 길들여야 할 것이다.

셋째, 마음에 정력(定力)을 쌓아서 자재(自在)하는 힘을 길러야 할 것이다.

넷째, 평소에 큰 원력(願力)을 세워놓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과학문명이 핵폭탄 발명에까지 이르렀다. 마찬 가지로 ‘도학문명’도 생사를 해결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이제 우리도 매일매일 생사를 연마하는 시간을 정하고 끊임없는 적공(積功)을 들여야 생사대해(生死大海)를 무난히 건널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의 사계(四季)의 시작은 죽음이다. 인생의 사계를 ‘생로병사’(生老病死)라 할 때 시작은 분명 ‘생’(生)’이다. 그러나 잘 죽어야 잘 태어남으로 인생의 사계를 ‘사생병로’(死生病老)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말은 부지런한 농부와 게으른 농부의 차이는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보느냐 마지막으로 보느냐에 달려 있는 것과 같다.

1월은 분명히 겨울이니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볼 수도 있고, 12월도 겨울이니 겨울을 1년의 마지막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나게 차이가 난다. 겨울을 1년의 시작으로 보는 농부는 겨울 내 객토도 하고 농사준비 기간으로 보낸다. 그런데 게으른 농부는 겨울 내내 움 추리거나 사랑방에서 노름이나 한다. 그러나 1년 후 추수에서 두 농부의 차이는 엄청나다.

장수국가 일본은 벌써 ‘웰 빙’은 가고 ‘웰 다잉’의 나라답게 죽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다. 시내 곳곳에 ‘웰 다잉 다방’이 있고, 사찰은 이미 무병장수를 비는 사찰보다는 ‘9988 234’를 축원하는 ‘핀코르’ 사찰이 유행이다. 일본 같은 선진국에서도 죽음에 문제가 부각된 것은 본격적인 장수국가로 일본이 전환된 2000년대 초반부터다.

그런데 지금부터 100여년 전에 이미 “나이가 사십이 넘으면 죽어 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하여야 죽어 갈 때에 바쁜 걸음을 치지 아니하리라”는 소태산 부처님의 말씀은 이제 ‘새 삶’만큼 ‘새 죽음’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경고의 말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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