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기행] 정지용 “통영·한산도 일대 자연미를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아시아엔=글/박정욱 여행기획가, 사진/서경리 월간 <톱클래스> 사진기자] 통영이 고향인 사람은 지독히도 행복하다. 그들은 유별나게도 통영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누군들 자신이 태어나 자란 고향을 사랑하지 않겠냐마는, 통영사람들의 통영사랑과 자랑은 외지인의 시각에는 지나치다 할 정도다.
빼어난 풍광, 400년 역사, 물과 뭍에 지천으로 널린 먹거리, 한민족을 구한 성웅(聖雄) 이순신을 만날 수 있는 곳. 유치진, 유치환, 전혁림, 윤이상, 김상옥, 김용익, 김춘수, 박경리, 김형근 등 한국 현대사를 빛낸 예술인들. 통영의 민초들이 수백년 빚고 지켜온 유형, 무형의 숱한 문화재들···. .
남도 끝자락의 조그만 도시가 왜 이렇게 자랑거리가 많은지, 이런 곳에 태어난 통영사람들은 타 지역 사람을 만나면 통영 자랑하느라 숨이 가쁠 지경이다.
통영이 고향인 사람들은 지독히도 행복하다!
매일매일 통영시티투어의 길라잡이를 하며 그같은 행복을 외지 손님들에게 전하는 필자로서는, 내가 자란 고향을 실컷 자랑하고 박수를 받으니 이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또 있을까?
기왕 말이 나왔으니 통영의 자랑거리를 실컷 늘어놓으려 한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외지인들은 대부분 ‘통영’을 남도 끝자락 조그마한 항구도시, 자연풍광 좋고 바다 먹거리가 풍부한 어촌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통영’(統營)이 일제 식민지의 불행했던 역사 탓에 한반도에서 열번째로 인구가 많았던 대도시였음을 아는 이는 드물다. 조선시대에는 경상, 전라, 충청 삼도의 수군을 총괄 지휘하던 삼도수군통제영이 약 300년간 주둔했던, 조선시대 변방의 으뜸도시였음을 아는 이도 드물다.
삼도수군통제사의 품계가 종2품이었으며, 조선시대에 종2품의 벼슬자리가 머문 지방 도시는 평양과 전주정도였으니, 통영은 조선중기 이후 조선 최고 지방도시 중 하나였다.
종2품의 삼도수군통제사 벼슬이 그 긴 세월 머물렀으니 그에 상응하는 문화가 꽃피었음은 당연지사. 그들이 먹었던 음식, 그들이 입었던 옷, 그들이 즐겼던 가락과 춤 등에서 어쩌면 한양 다음 가는 고급문화를 향유했을 것이다. 덕분에 통영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문화에 익숙했을 터이다.
그 깊은 뿌리는 지금 △통영국제음악제 △통영연극제 △통영문학제 △통영한산대첩축제 등으로 꽃 피우고 있다.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시원하여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기후조건을 갖춘 데다, 지형적으로는 리아스식 해안으로 해안선이 발달하여 바다생태계에서 각종 해산물이 풍부하다. 그뿐인가? 해안선과 수많은 섬들이 빚어내는 풍광은 통영을 이탈리아의 미항(美港) 베니스에 견주기도 한다. 아니, 나는 베니스를 ‘이탈리아의 통영’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시인 정지용은 청마 유치환과 동행한 통영여행에서 주옥같은 글들을 남겼는데, 심지어 이렇게 표현했다.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과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통영 5)
이순신장군이 임진왜란의 전세를 역전시킨 한산해전이 통영 앞바다에서 펼쳐졌으니, 민족의 살아있는 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김정은의 북한 핵실험과, 주변 4강에 한반도 운명을 좌지우지 하려는 이때, 세병관(洗兵館)과 제승당(制勝堂)에서 충무공의 숨결을 느껴봄직하다.
삼도수군통제영에서 유래된 ‘統營’이란 지명 또한 통제영을 창설한 이순신장군이 지은 이름이라 통영사람들은 그 이름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지난 1995년 충무시와 통영군을 통합할 때, 40년간 사용하던 ‘忠武’라는 지명을 과감히(!) 버리고 ‘통영’을 도시명으로 정하면서 통영사람들이 조금도 주저하지 않은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