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 서거 8주기, 다시읽는 추모글

어제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였다. 노 대통령은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는 유서를 남겼다. 봉하마을에 세워진 작은 비석에는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입니다”라고 새겨져 있다.다음 글은 손혁재 시사평론가가 그해 6월 참여연대가 발간하는 <참여사회> 간행물에 실은 글이다. <아시아엔> 독자들과 공유한다.(편집자)

[아시아엔=손혁재 시사평론가] 아이콘이 사라졌다. 아니,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을까. 어둠이 짙을수록 별이 더욱 빛나듯이 시대가 어려울수록 그 아이콘은 더욱 빛나게 될까.

‘정치개혁의 아이콘’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소식을 들은 건 일본 우토로에서였다. 교토자유대학 초청으로 리츠메이칸대학 평화박물관에서 열린 ‘지역에서의 평화만들기’라는 주제의 세미나에 참석한 뒤 우토로를 방문하였다. 일제에 강제로 끌려왔던 조선인노동자들의 합숙소를 둘러보던 중 서울에서 날아온 문자메시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는 짧은 메시지. 믿기지 않았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잇달아 날아오는 여러 통의 문자메시지는 서거가 현실임을 일깨워주었다. ‘마구잡이정권의 출현과 개검의 칼춤을 구경한 우리는 공범자며 역사의 죄인’이라는 한 지역운동가의 메시지를 읽으며 목이 메었다.

우토로에서 만난 한 할머니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었다. 고향인 경남 사천에 가보고 싶었으나 아직 가보지 못했다는 이 할머니는 우토로 문제가 해결된 것이 노무현 전 대통령 덕분이라며 고마워했다. 사회의 그늘진 곳, 어두운 곳에 늘 따뜻한 관심을 보였던 노 전 대통령의 눈길이 나라 안이 아닌 우토로도 비껴가진 않았던 것일까.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TV토론에서였다. 1997년 초였을 것으로 기억된다. 한보 비리가 불거져 김영삼 전 대통령(당시는 현직이었다)의 둘째 아들 김현철 씨가 구속된 뒤였다. 이 문제를 다룬 KBS의 <심야토론>에 출연해서 노무현 변호사(당시 노무현 전 대통령은 15대 총선에서 떨어져 현직의원이 아니었다)를 처음 만난 것이다. 14대 국회에서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원칙과 소신의 정치인’이라 호감을 갖고 있던 터에 함께 방송에 출연한 것이 기분이 좋았다. 노 변호사는 자신의 후원회장인 방송작가 이기명 선생을 소개해 주었다. 뜻밖이었다. 이기명 선생은 참여연대의 열성회원이었다. 자신이 노 대통령 후원회장이라는 걸 밝힌 지 않고 그저 묵묵히 참여연대 회원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에 다소 놀랐다. 또 다른 정치인들처럼 유명인사를 후원회장으로 모시지 않은 노 변호사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토론을 하면서 다소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시종일관 부정부패에 대한 엄격한 대책, 김현철 씨의 엄정한 사법처리를 주장했고 김영삼 정부의 무능을 비판했다. 노 변호사는 부패척결에 대해서는 나와 같은 의견이었지만 김영삼 정부에 대해서는 그다지 날카롭게 각을 세우지 않았다. 나는 다소 실망하면서 속으로 ‘이 분이 YS의 공천으로 정계에 입문해서 그런가’ 멋대로 생각했다. <심야토론>을 끝내고 방송국을 나오니 마침 벚꽃축제로 교통이 엉망이었다. 노 변호사가 자신의 차로 일단 여의도를 벗어나자고 권해 그 차를 타고 나오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만 노 변호사에 대해 실망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도 내 발언에 대해 불만이 있었다. 노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아까 YS가 무능하다고 하셨죠? 슈퍼마켓을 운영할 정도의 능력밖에 없는 사람이 백화점 운영을 맡은 격이라고 하셨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그렇게 말하면 그냥 YS가 무능하다고 국민들이 생각하는 게 아니구요, 민주개혁세력, 진보세력은 국정운영능력이 없다고 받아들이게 되는 겁니다. YS의 국정실패는 YS의 무능보다는 지역주의 정치구조때문입니다.” 귀가 번쩍 뜨였다. 문민정부의 보다 근원적인 한계가 지역주의에 있다는 지적. 나는 현상보다는 본질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지역주의 극복에 대한 신념이 강한 노 전 대통령을 다시 보게 되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운영하던 ‘지방자치실무연구소’의 부소장, ‘자치경영연구원’의 부원장과 원장을 맡기도 했다.

사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우리나라에서 지역주의 문제를 가장 치열하게 껴안았던 정치인이다. 지역주의에 대한 노 대통령의 고민은 1998년 10월에 했던 인터뷰에서 다시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지 <참여사회>에 「손혁재가 만난 사람」이 연재되고 있었는데 1998년 11월호 대상자가 노무현 의원이었다. 편집위원회는 ‘노사분쟁의 해결사 노무현’이라는 제목을 주었지만 나는 노무현 의원을 노동전문가로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정치개혁의 선봉장’으로서의 노무현, ‘새로운 정치인의 유형’으로서의 노무현이 그에게 주어진 더 큰 역할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내가 인터뷰를 마치고 넘겨준 글의 제목은 ‘노무현의 정치개혁대망론’이었다.

「철학까페 느티나무」에서 마주 앉자마자 노무현 의원이 제일 먼저 꺼낸 화두는 정치와 운동의 관계였다. “운동이 원칙의 문제라면 정치는 선택의 문제더군요. 운동은 항상 원칙적으로 문제제기를 계속해 나가는 것이고 부득이한 선택에 대해서는 용서가 없는 것이죠. 이에 반해 정치는 선택인 거지요.” 정말 그렇다. 정치는 살아 있는 생물이라 했던가. 끊임없이 부닥치는 선택의 상황에서 최선의 길만 선택하는 정치가 상지상(上之上)이라면 결과적으로 최악의 길만 골라서 간 하지하(下之下)의 선택도 있을 것이다. 과연 정치인 노무현의 선택은 어떤 것이었을까.

국민의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에 대해 노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개혁에 대한 강력한 저항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득권자들의 양보를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아마 5년 뒤 자신도 똑같은 어려움에 부닥치리라고 그때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엄청난 저항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층의 저항은 이미 예상했던 것. 따라서 기득권세력의 저항을 어떻게 제압하느냐 하는 것이 개혁 프로그램에 있어야 했고, 결국 이 개혁 프로그램이나 개혁 주체세력에 문제가 있으면 아니 될 터. 뜻밖에도 이 문제를 노무현 의원은 지역주의로 풀었다.

“우리 사회는 개혁 대 반개혁 세력으로 전선이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지역을 기준으로 형성되어 있지요. 영남은 어떠한 개혁도 반대하고, 호남은 어떠한 반동적 정책도 OK하는 이런 정치상황 속에서 개혁주체 세력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보수적인 조치들조차도 저항을 받잖습니까? 김대중 정권이 개혁적 주체만으로 형성되지 못한 것은 사실인데, 이것은 지역주의 때문입니다.” 강한 지역주의 때문에 새로운 권력의 주체 형성이 장애에 부닥쳐 있다는 것. 따라서 노 의원은 동서로 형성된 전선을 뛰어넘는 정치주체를 형성하는 것이 김대중 정부의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솔직히 말하면 정권은 개혁보다 정권의 유지가 먼저입니다. 개혁을 통해 정권을 강화시킬 수 있을 때 개혁을 하는 것이지 개혁을 통해 정권이 약화된다면 개혁은 못하는 겁니다. 정권이 유지되고 개혁이 있는 것이지 정권이 무너진다면 개혁도 없는 것이죠. 선택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역주의적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고, 이 정권이 실패하면 개혁 주체가 새로 형성된다는 기대를 할 수도 없습니다. 결국 지역주의 극복이 이 정권 최대의 과제가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개혁은 그 사회의 가장 심각한 모순과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역주의의 극복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개혁이죠.”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총선으로 정계에 입문한 때부터 서거하기까지 그의 정치역정을 관통한 화두는 지역주의 극복이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은 그다지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진보진영에서는 무능과 비개혁으로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가 실패했다는 평가가 보편적 정서이다. 그러나 이제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엄밀하게 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정치불신과 무관심이 강하지만 정치개혁 분야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인정할 수 있다. 검찰과 경찰, 정보기관 등 권력기관을 동원해 통치하던 나쁜 관행도 줄어들었다. 아직 흡족할만한 단계는 아니지만 분권과 균형발전의 성과도 눈에 띤다. 현대사에서 미완의 과제였던 과거청산 작업의 시작도 올바른 평가가 필요하다. 지역주의 극복 노력도 눈에 띤다.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를 떨어뜨린 가장 큰 원인은 경제를 망쳤고 이로 말미암아 삶이 더 어려워졌다는 ‘경제위기론’일 것이다. 일자리 창출이 지지부진하고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부동산 광풍은 서민의 내 집 마련 희망을 앗아갔다. 사교육비 부담도 서민의 등뼈를 휘게 만든다. 이처럼 국민이 체감하는 삶의 어려움은 크지만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실패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수출 3천억 달러의 달성과 외환 보유고 증가, 경제개발협력기구 평균을 웃도는 성장률 등 긍정적인 성과도 있다. 경제성장률 5%는 OECD 나라들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이며, 경기불황에서 회복됐다는 일본의 경제성장률 2%에 비해 두 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경제를 파탄시켰다고 비판받은 것은 참으로 안타깝다.

노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으로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대연정 제안이었다. 국민이 헌정 사상 처음으로 개혁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정치세력에게 원내 과반의석을 주었다. 그런데도 4대 개혁입법 처리 무산 등 시종 무기력했다. 경제와 국민의 삶에 엄청난 영향을 끼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무리하게 밀어붙이고, 평택 미군기지 문제 해결도 무리수가 많았다. 이런 상황에서 반대와 비판의 소리가 높아지자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한 것은 큰 실수였다.

“사람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분노” 때문에 정치입문을 결심했다는 노무현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이 꼽는 지도자의 조건은 신뢰였다. “개인의 역량이나 지도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지역주의 같은 비합리적 요소들이 해소돼야 호감을 갖고 지지하는 가운데 지도자가 등장”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신뢰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합니다. 신뢰받지 못하면 어떤 일도 성과를 얻지 못하죠. 몇 마디 거짓말, 몇 가지 이데올로기로 국민을 통치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제는 무조건 잘난 사람이 아니라 잘못이 있어도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면 함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같은 신뢰의 바탕은 공정성이라는 게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각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해서 공적 발언에 책임을 지고, 손해가 되더라도 공정하게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 그 다음으로 꼽는 조건은 성실성이다. 이밖에 판단력,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때 시민운동에의 투신도 생각해 보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4·11총선 떨어진 뒤 박원순 변호사에게 정치를 계속할 수 있을지 모르겠으니 참여연대에 일자리 하나 달라고 했는데, 못했어요. 정치도 중요하니까 정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래서 정치로 돌아오고 말았는데 정치에서 길이 막히면 참여연대 같은 시민운동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참여정부라는 명칭 때문에 참여연대가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시민운동과 같은 관점에서 정치를 했던 것이라 평가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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