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오신날-아시아불교 30] 라오스②란상왕국 파군·삼센타이·위소운 왕 때 ‘전성기’

파군(Fa Ngum, 1353~1373) 왕

3일은 불기 2561년 부처님오신날입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의 자비와 은혜가 독자들께 함께 하시길 기원합니다. <아시아엔>은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스리랑카·미얀마·태국·캄보디아·라오스·인도네시아·베트남 등 아시아 각국의 불교의 어제와 오늘을 <불교평론>(발행인 조오현)의 도움으로 소개합니다. 귀한 글 주신 마성, 조준호, 김홍구, 송위지, 양승윤, 이병욱님과 홍사성 편집인 겸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편집자)

란상 시대(1353~1694)

[아시아엔=송위지 성원불교대학장] 라오스의 역사는 1991년 제정된 라오인민민주주의공화국 헌법 전문에 나타나 있다. “다민족에 의해 형성된 라오스 인민은 몇천년을 걸쳐 사랑하는 이 땅에 정주하며 발전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우리 조상들은 통일된 란상 왕국을 건국해 번영을 누렸다.” 이 전문에서 알 수 있듯이 라오스의 역사는 란상(Lan xang, 1353~1694)부터라고 할 수 있다.

란상왕국을 건국한 것은 타이계 라오족인 파군(Fa Ngum, 1353~1373) 왕이다. 파군은 젊은 나이에 이 지역을 지배하던 쑤코타이 세력을 몰아내고 흩어져 있던 소수종족들을 규합하여 왕국을 란상이라고 하고 수도를 무앙수와로 정했다. 란상은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뜻으로 옛날 이 지역에 코끼리들이 많이 살아 중국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 시절 불교가 언제 어떻게 전래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라오스불교의 발전은 대개는 캄보디아와 타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이때는 캄보디아가 불교를 통한 이웃과의 선린외교를 펴던 시절로, 캄보디아와의 관계가 돈독하였으며 캄보디아 왕조와 결혼을 통한 교류도 이루어졌다. 당시 라오스왕조로 시집온 캄보디아의 공주는 상좌부불교를 직접 교육받았던 독실한 불교신자다. 파군의 왕비인 케오 켕 야는 라오인들이 코끼리와 물소를 죽여서 제단에 바치는 영혼공희 의식에 반대하여 라오왕조에서 불교를 신봉할 것을 파군에게 간청하였고, 만일 자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자신은 크메르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파군은 장인의 국가인 크메르로 사신을 보내 불교 승려들을 초대하였다. 이에 크메르의 왕은 왕사인 마하 파스만를 비롯한 20명의 승려와 다른 세 분야의 기술자들을 파견하였다. 이들을 이끌었던 승려인 마하 텝 랑카는 스리랑카 출신이었다. 이때 함께 온 스리랑카 승려는 그의 사형인 마하데와랑카, 사제인 마하데와랑카와 마하나디판나들이었다. 이는 스리랑카식 불교인 상좌부불교가 라오스에 뿌리내렸음을 말해준다. 이를 계기로 라오스 왕실은 물론 라오스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던 타이계의 라오족들은 주로 상좌부불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는 파군의 정통성을 높여주었을 뿐 아니라 국민의 정신적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파군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삼센타이(1373~1416)는 43년간 통치했는데 베트남과 센강·삼누아 전투에서 승리하여 라오스의 지위를 공고히 했다. 그는 불교가 국민과 더 가까워질 수 있도록 사원을 건립하고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사원 학교들도 세웠다. 그는 마하텝랑카 스님과 마하파스만 스님을 국민에게 일체감을 심어주고 통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특별히 건립된 왓캐오 왕실사원의 수장으로 삼았다. 또 프라방 불상을 보존하는 것으로 유명한 왓마노롬 사원 역시 삼센타이 왕에 의해 세워졌다. 그의 재임 말기까지 루앙프라방을 불교교육과 전파의 핵심적인 곳으로 삼았다고 라오스의 역사학자 마하 실라 워라웡은 기록했다.

삼센타이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인 위소운(Vixoun) 왕은 불교를 전파하는 데 매우 공이 컸다. 1503년 위소운 왕은 대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왓위소운(Wat Vixoun, 大寺)을 건립하였다. 1504년에는 대불상을 완성하여 왓위소운에서 대규모 의식을 봉행했다. 이 시절에 빠알리 삼장을 라오어로 번역하는 불사를 하였으며, 그 시절부터 번성했던 위슈말리(Visumali) 같은 시적인 통치규칙이 제정되었다.

왓위소운(Wat Vixoun, 大寺)

위소운 왕의 아들 포티사라트 왕(1520~1550)도 독실한 불교도다. 그는 현재의 태국인 치앙마이와 아유타야에서 온 두 명의 공주와 각각 결혼했으며 이들 왕국과 불교를 바탕으로 교류했다. 이로 인해 라오스는 물론 치앙마이와 아유타야에도 불교도가 늘어나게 되었다. 1523년 포티사라트 왕은 치앙마이로 프라텝몽콜 스님이 이끄는 불교사절단을 통해 라오어로 쓰인 경·율·론 삼장 60부를 보냈다. 1525년 왕은 치앙마이에서 율사로 교육받은 마하 수무다코테 스님이 주재한 왓위소운의 수여식에서 큰스님에 준하는 성직자로 임명된 이후, 매우 깊이 있는 종교교육을 받았다.

1527년에는 국민에게 영혼숭배를 금지하고 불교만을 믿도록 지시했으며 그동안 영혼숭배가 행해지던 곳에 사원을 지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라오스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부터도 대단한 호평을 얻었다. 얼마 동안 치앙마이에 머물렀던 왕은 돌아올 때 에메랄드 불상과 스리랑카 양식의 불상인 프라시캄을 모셔왔다.

그 후 사이세타티라트 왕(1548~1571) 때 라오스는 현재의 베트남인 안남과 태국 아유타야의 침입으로 내부적인 갈등을 겪었다. 또한 태국 북부 치앙마이 왕국에서 왕위 계승 문제로 전쟁이 발생하여 버마족과 40년이 넘는 기간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사이세타티라트 왕은 버마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 새로운 수도로 비엔티안을 건설했다. 그는 루앙프라방에는 프라방 불상을 남겨두고 고승을 머물게 해서 일반 국민이 예배할 수 있게 했으며 에메랄드 불상과 프라 시캄은 수도로 모셔갔다. 1566년에는 원래 힌두교사원이 있던 곳에 왓탓루앙 사원을 중건하고 탓루앙 대탑을 건립했다.

세타티라트 왕은 치앙마이와 힘을 합해 버마족을 물리쳤는데 이때 왕은 포티사라트 왕의 어머니 즉 자신의 할머니-치앙마이족의 공주였던-와 국가를 위한 사원을 건립했다. 이 사원이 바로 오늘날까지 라오스 국민의 정신적 지주가 되고 있는 비엔티안 시의 케오사와 루오사다. 하지만 이후 버마와 씨암의 침공으로 나라가 피폐해졌으며 불교 역시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1639년에는 수리야봉사가 왕위에 올라 55년간 라오스를 다스렸다. 그는 자신의 재위 동안 비엔티안을 불교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많은 시와 문학작품을 통해 불교연구를 진작시켰다. 서양과의 접촉도 이루어져 네덜란드 상인이 라오스에 들어왔다. 1641년 네덜란드 상인 게리트 반 우이스토프가 비엔티안을 방문했을 때 왕은 왓탓루앙 사원에서 그를 맞았는데 먼 도시에서 많은 순례자가 찾아오는 아름다운 사원과 조각, 건축, 벽화와 음악과 춤으로 가득한 활기찬 왕국의 모습을 자랑했다.

1670년 왕은 아유타야로 사절단을 보내 선린외교를 회복했다. 또한 그는 백성들의 사회적 지위와 관계없이 모든 이들이 공평하게 지위를 누리는 법률을 제정하였다. 이때를 라오스의 황금 시기라 부른다. 수리야봉사가 사망하자 란상 왕조는 막을 내렸는데, 이와 함께 불교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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