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JA 한몽미래포럼] ’13세기 대초원’ 징키스칸 말 달리던 냉혹한 삶의 현장

가혹하고 비정한 자연 벗삼아 뜨거운 열망으로 이룬 칭기스칸 후예

자본주의 소비사회 강요하지만 면면히 흐르는 제국의 DNA 살아

1476410788380

[아시아엔=조덕진 <무등일보> 아트플러스 편집장] “나는 흘러가버린 과거에 매달리지 않고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개척해나갔다. 알고보니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깡그리 쓸어버렸다. 나 자신을 극복하자 나는 칭기즈 칸이 되었다.”(김종래 <밀레니엄 맨 칭기즈 칸> 중에서)

몇 시간을 달려도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대초원, 구릉만이 간간이 이곳이 대지임을 알리고 암석이 산의 형상을 이룬다. 이 광활함을 떠받치는 드높은 하늘에 이르러서는 대자연이라는 거대한 숨결 외에 달리 다른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방문자의 눈에 하나의 풍경으로 비치는, 감탄을 자아내는 대초원은 그러나 이곳 거주민들에게는 생명을 건 생존의 무대다. 끝없는 지평선을 내달려 사방천지를 둘러봐도 농작물 한 톨 거둘 땅이라곤 없는 척박한 대광야. 초원을 견딜 수 있는 양과 말, 염소 등 동물들과 살아남아야 한다.

봄 여름은 잠깐이고 겨울은 이르고 혹독하다. 사막에서 살아남도록 진화된 지구 최강의 동물 낙타도, 이들 중 등에 봉을 두 개나 단 쌍봉낙타까지도 한줌 바람같이 쓰러져 나가는 냉혹한 광야다. 이 척박하고 황량한, 사람에게 더 없이 몰인정한 이 땅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강국을 이뤘을까.

몽골을 만나는 일은 칭기즈칸의 그림자를 그의 숨결을 호흡하는 일이다. (사)아시아기자협회(회장 아시라프 달리)에서 2017년 가을 문화탐방으로 마련한 몽골여정도 칭기즈칸과의 만남이었다.

?13세기 캠프 칭기즈칸의 발길이 머문 곳

울란바토르에서 2~3시간 거리에 있는 ‘13세기’. 21세기 몽골인들은 칭기즈칸 시대의 영광을 기리기 위해 그곳 지명을 ‘13세기’라 부르고 있다. 13세기는 칭기즈칸이 대몽골제국을 건설한, 몽골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강대했던 시절이다. 칭기즈칸을 직접적으로 호명하지 않고 그가 누비고 누렸던 시대를 호칭한 몽골인들의 마음이 느껴진다. ‘13세기’라는 이름이 아니면, 칭기즈칸이 야영했던 곳이라는 설명이 없으면 몽골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평원에 다름 아니다. 800여년 전의 일이거니와 유목생활의 특성상 역사적 흔적이 남기 어려운 탓이리라. 이곳에는 당시의 복식과 실내가구를 비치해 13세기 향취를 음미할 수 있도록 배치된 대형 게르를 비롯해 여행객을 위한 숙박용 게르들도 설치돼 있다. 인근에 칭기스칸이 공부를 했다는 곳에도 역시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도록 게르를 복원해 놓았다.

당시 칸이 머무른 게르의 실제와 비슷한 구조와 모습이라고 하나 대제국의 위용이나 위상을 느끼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비치된 가구나 복식들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대형 게르가 대초원을 가르며 멀리 유럽 러시아까지 수없이 이동했을 것을 생각하면, 칭기즈칸과 그의 동료들의 원대한 꿈과 뜨거운 마음이 어느새 내게 다가온다. 쏟아질 듯한 몽골 밤하늘의 수많은 별처럼 더욱 뚜렷이 말이다. 그건 광활한 몽골 초원을, 지평선을 끼고 유럽으로 유럽으로 내달렸을 13세기 칭기즈칸의 꿈 바로 그것이다.

10월 초순인데도 날씨는 냉정했다. 게르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나 일행 중 일부가 고통을 호소해 호텔로 숙소를 변경해야 했다. 비교적 견딜만하다는 시월 초순의 날씨에도 현대인은 단 하룻밤도 견뎌내지 못했다. 혹독한, 사람은 물론 환경에 적응된 동물도 살아남기에 턱없이 살벌한 이 땅을 터전으로 몽골인은 세계 역사상 최고 최강의 제국을 건설했다. 중국·이슬람·유럽 문명을 정복했을 뿐 아니라 그 거대한 제국을 150년간이나 통치했다. 칭기즈칸이 이룩한 땅은 777만 평방킬로미터로 서양 최고의 왕으로 꼽히는 알렉산더대왕(348만)과 나폴레옹(115만) 히틀러(219만) 등 세 정복자를 합친 것보다 훨씬 넓다. 그의 손자 쿠빌라이가 중국에 세운 원나라까지 합하면 면적은 두 배에 달한다. 확장된 영토의 규모에서가 아니라 그가 영토의 가치를 바꿨다는 점에서 21세기 들어 그를 재조명하는 연구서들이 잇따르고 있다.

척박하고 비정한 환경 이겨내고 세계와 소통

이집트나 다른 나라처럼 세계 최고의 문명을 구가한 것도, 비옥한 땅이나 천혜의 자연환경을 보유한 것도 아닌 이 척박하고 황량한 땅에서. 무엇이 이들을 세계 최강으로 이끌었을까. 칭기즈칸이란 세기의 인물은 어떻게 탄생했을까. 황량한 자연환경에서 부족의 보호 없이는 생존자체가 불가능하던 시절, 9세에 아버지를 잃고 부족에게 버림받아 쥐를 잡아먹으며 겨우 연명한, 이 불행한 환경의 청년이 어떻게 원대한 꿈을 꾸고 자신을 키워갔을까.

김종래씨의 <밀레니엄 맨 칭기즈칸>에 실린 ‘칭기즈칸의 편지’(김종래씨가 쓴 글로 칭기즈칸의 발언은 아니다)는 칭기즈칸을 간접적으로나마 만날 수 있게 한다.

1476410863752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고향에서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천신만고 끝에 부족장이 된 뒤에도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적진을 누비면서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약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고, 지혜로는 안다. 자모카를 당할 수 없었으며 힘으로는 내 동생 카사르한테도 졌다. 그 대신 나는 남의 말에 항상 귀를 기울였고, 그런 내 귀는 나를 현명하게 가르쳤다.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고, 가슴에 화살을 맞고 꼬리가 빠져라 도망친 적도 있었다…, 극도의 절망감과 죽음의 공포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아는가? … 숨을 쉴 수 있는 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엄혹한 자연, 냉혹하고 비정한 부족들의 목숨을 건 생존경쟁. 이 모든 악조건을 뚫고 칭기즈칸은 투지를 불태우고 꿈을 꾸었으며 최소 인력으로 대제국을 건설했다. 단 10만의 기병으로 아시아와 유럽 이슬람을 재패했다.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칭기즈칸의 나라로 떠나는 여정은 사실 단순 소박했다.

칭기즈칸의 숨결을 호흡해보자는, 대초원과 드높은 하늘에 안겨 비루한 일상에 허덕이는 영혼을 정화하겠다는. 그러나 짧은 여정 속에 울란바토르라는 도시와 대초원, ‘13세기’는 많은 상념을 불러일으켰다.

제국의 후예들, 제국의 DNA 면면히 흐르고

몽골의 역사, 칭기즈칸의 숨결을 뒤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위대한 영혼이 가족을 거두고 부족과 백성을 챙기고 동료(신하)들과 나눴을 뜨거운 마음 언저리를 맴돌며 그 광휘의 자락에 젖어들었다. 그는 정복지의 종교를 허용했으며, 상호 교역하면 평화를 보장했다. 전쟁 중 개인적 약탈을 철저히 금했고 전리품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정하게 분배했다. 규율을 어기거나 교역을 거부하는 국가나 집단에는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응징했다. 잔혹함은 적들을 떨게 했고 건너편의 관용은 전쟁 없는 항복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출신성분을 따지지 않았다. 그와 최전선에 섰던 핵심참모 4준마 4맹견에는 노예출신도, 적의 포로도 있었다. 심지어 그는 제 자식을 제치고 노예출신에게 장군자리를 부여했다. 그는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기도 수백년 전에 이미 지구촌을 경험했으며 만들어냈다. 그러나 유럽과 러시아 중국까지 재패한 몽골은 그 비대한 몸을 가누지 못하고 공룡처럼 쓰러졌다. 근대에 들어 어렵사리 독립국가를 이뤘다.

세계를 재패했던 화려한 역사에도 불구하고 나라의 절반은 내몽골이란 이름으로 중국에 앗기고 자신들의 땅은 외몽골이라는 서글픈 별칭을 갖고 살아간다. 자본주의 대열에 뒤늦게 합류한 탓에 가난과 저개발국이란 어려움에 시달리며 과거를 팔아먹고 살아가는 오늘. 이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기자들을 비롯해 현지에서 만난 몽골리안은 자신들의 역사와 영광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했다. 화폐에 칭기즈칸의 얼굴이 새겨있는 것은 물론이고 한 컬렉터의 사설 갤러리에서 만난 수많은 그림에서도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가 지나간, 잠시 머문 자리마다 그의 그림자를 혼불 삼아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현지에서 만난 한 대학생은 ‘꿈이 뭐냐’는 질문에 “대학(우리로 치면 서울대에 해당하는 울란바토르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을 마치고 미국이나 한국으로 가는 게 꿈”이라고 답했다. 슬픈 현실인가 비정한 현실인가.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내몰린 우리와 다를 게 하나 없다. 다만, 대몽골족의 후예마저 ‘천박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내몰리는 게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만 칭기즈칸이라는 광대한 영혼의 DNA가 면면히 흐르는 한, 장대하고 뚝심있는 걸음이 이어질 것이라 기대해본다. 인간에 대한 기대이자 미래에 대한 희망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