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채수일 한신대총장 ‘사랑이란?’②] 지금 바로 고린도전서 13장을 펼쳐보세요
[아시아엔=채수일 한신대 총장] 교회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말씀은사, 믿음의 은사,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의 은사, 예언의 은사, 영 분별의 은사, 각종 방언의 은사, 통역의 은사(고전 12장8-10절) 등 다양한 은사가 주어진다. 그러나 이 모든 은사의 다양성은 한 분이신 성령께서 행하시는 일이다(고전 12장11절). 바울은 교회 안의 은사의 다양성을 서술하면서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고 권면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고전 12장31절).
바울이 말하는 사랑은 은사, ‘카리스마’이지, 개인의 감정이나 의지의 행동, 혹은 연인들이나 갈등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도덕적 충고가 아니다. 사랑이 영적 은사라는 말은 사랑을 감상적인 것으로, 사소한 것으로, 개인적인 것으로 축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관심과 배려, 연민과 친절함, 민감함, 사려 깊음, 신실함 등도 사랑의 훌륭한 행위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랑을 은사, 카리스마로 이해한 사도 바울에게 사랑의 근거는 인간적 능력(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신적 사랑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거나, 상대가 사랑받을 만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요한1서 4장19절). 사랑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사랑은 사람들이 추구해야 할 하나의 덕목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사랑은 하느님 자신의 본성이고 존재이며, 인간의 능력에 근거한 예언이나 지식과는 달리 하느님의 존재에 근거한 인간적인 관계들의 본질적 현시다. 사랑은 하느님 자신의 본질적 활동이기 때문에 가장 위대하고, 영원한 은사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람들 사이의 개인적 감정이나, 연민, 능력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며, 심지어는 종교적인 행위나 태도가 아니라고 바울은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 13,1-3)
‘사람의 방언’, ‘천사의 말’, ‘예언의 능력’, ‘신비에 대한 깨달음’, ‘모든 지식’, ‘산을 옮길만한 완전한 믿음’같은 능력이나 은사보다 더 큰 종교성이 어디에 있을까?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것’보다 더 큰 헌신적 사랑이 어디에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왜 사도 바울은 위대한 헌신의 행위, 위대한 종교성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얼마든지 사랑 없이도 종교체험을 할 수 있으며, 사랑 없이도 자기 소유와 자기 몸을 내줄 수 있는 현실, 인간 내면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는 ‘자기 자랑’을 위해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불사르게 하다’는 말이 다른 사본에는 ‘자랑하기 위하여’라고 되어 있다.
인간은 자신을 자랑하기 위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하여 얼마든지 가식적으로 영웅적 행위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 없으면, 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그런 사랑의 행위는 영원할 수 없으며, 진실할 수도 없다. 사랑이 종교보다 위대하고 종교보다 진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본질인 사랑은 어떻게 드러날까?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