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패널티킥 때 골키퍼와 키커는 어느 쪽으로 몸을 움직일까?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회 명예회장] 편착심(偏着心)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를 말한다. 그런데 이 편착심은 누구나 싫어하면서도 쉽게 버리지 못하는 속성이 있다. ‘덕화만발’ 카페에서는 ‘4대강령’을 제정 반포했다.
하나, 우리는 맑고, 밝고, 훈훈한 낙원세상을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를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서로 돕고 이끄는 상생상화의 정신을 지향한다.
하나, 우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축구경기에서 페널티킥을 하는 선수들은 대개 어느 쪽으로 공을 찰까? 이스라엘 학자 바 엘리는 페널티킥 상황을 오랫동안 관찰했다. 그 결과 선수들의 3분의 1은 골의 중앙으로, 3분의 1은 왼쪽으로, 나머지 3분의 1은 오른쪽으로 찬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골키퍼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예상 외로 골키퍼의 2분의 1은 왼쪽으로, 나머지 2분의 1은 오른쪽으로 몸을 날렸다. 공의 3분의 1이 골의 중앙으로 날아온다는 분석 결과가 있는데도 골키퍼들이 중앙에 멈춰 서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왜 그럴까? 팔만 벌리고 중앙에 멈춰 서있는 것보다는, 틀린 방향으로라도 몸을 날리는 편이 더 나아 보이고 심리적으로 덜 괴롭기 때문이다. 비록 아무 소용없는 헛짓이 되더라도 골키퍼가 몸을 날리는 이유다. 이른바 행동 편향(action bias)이다.
대비되는 개념으로 부작위(不作爲) 편향(omission bias)이 있다. 어떤 일을 함으로써 발생하는 자신의 개인적 피해보다 어떤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는 사회적 피해를 가볍게 생각하는 인간의 특성을 일컫는다. ‘부작위’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일부러 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부작위 편향은 어떤 행동을 하든 안 하든 폐해를 불러올 수 있는 경우에 주로 나타난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대부분 안 하는 쪽을 선택한다. 그 이유는 일을 저질러서 생기는 폐해보다 안하는 편이 왠지 덜 해로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혼자보다 여럿이 같은 일을 할 때 힘의 강도가 떨어지는 사회적 태만(social loafing)과도 일맥상통한다.
세무서에 세금을 신고하지 않는 부작위는 세금 관련 서류를 위조하는 작위보다 덜 나쁘게 느껴진다. 둘 다 결과는 같은데도 말이다. 다만 행동편향은 어떤 상황이 불분명하고 모순적이고 불투명할 때 작용하는 반면, 부작위 편향은 대부분 판단이 가능한 상황에서 나타난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보다 행동을 거부하는 것은 눈에 덜 띄기 때문이다.
독일 작가이자 지식 경영인 롤프 도벨리(Rolf Dobelli)는 그의 저서 <스마트한 생각들>에서 많은 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은 사람들이 스스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고 지적했다. 의식적이든 아니든 편착, 편견, 편향, 환상, 확신, 오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향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고 했다.
첫째, 호감편향(liking bias)이다.
미모의 판매원에게 현혹되어 계획하지도 않았던 물건을 사는 행위 같은 것이다.
둘째, 권위자 편향(authority bias)이다.
권위 있는 전문가의 말을 과신하는 행위다.
셋째, 이기적 편향(self-serving bias)이다.
성공의 원인은 자신에게 돌리고 실패의 원인은 남이나 외부 요인으로 돌리는 행위다.
넷째, 가용성 편향(availability bias)이다.
자기 경험 또는 자주 들어 익숙해진 것을 가지고 세상사를 재단하는 행위다.
다섯째, 연상 편향(association bias)이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했다. 뜨거운 부뚜막에 앉았다 혼이 난 고양이가 차가운 부뚜막을 보고도 기겁을 하듯 징크스를 믿는 것이다.
여섯째, 확증 편향(conformation bias)이다.
새로운 정보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기존의 이론이나 세계관, 그리고 확신하고 있는 정보들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받아들이지 않고 걸러내는 행위다.
일곱째, 결과 편향(outcome bias)이다.
과정의 질은 도외시한 채 결과만 보고 어떤 사안을 평가하려고 하는 행위다.
그럼 우리가 갖는 편착심과 아집과 집착은 버릴 수 없는 것일까? 나이가 든다는 것은 편견과 아집과 집착을 버려가는 과정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인간적인 성숙을 의미한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도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좌우도 둘러보고 뒤도 볼 줄 알아야 집착과 편견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된다.
오로지 앞만 보고, 나만 생각하며 사는 삶에는 여유가 없다. 여유가 없는 사람은 남을 배려할 마음도, 남의 얘기를 경청할 귀도 못 갖게 마련이다. 이것이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면서도 생각과 뜻과 의지가 평행선을 그리는 이유다.
삶에서 여유를 갖는다는 것, 싫은 얘기까지도 허허 웃어넘길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인격이다. 편견은 고칠 수 있으나 아집은 고칠 수 없다. 이와 같이 편견이나 아집은 중도가 아니다. 사물을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보며 상생(相生)하고 상화(相和)하며 살아가는 것이 중도이고 진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