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산업 추락 어디까지?···박근혜 ‘창조경제’ 디딤돌로 전화위복 되길
[아시아엔=김영수 국제금융학 박사] 요사이 조선업계의 전반적인 부실이 뉴스로 떠올랐다. 세계적인 불경기 탓에 화물 물동량이 제일 먼저 줄어들고 이에 따라 선박을 이용하는 화물주가 감소했다. 배가 안 팔리는 게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해양 시추장비(석유플랜트)는 장사가 잘 된다고 하니, 한국의 조선회사들은 그리로 모두 몰려갔다. 몰려가면서 “드디어 차세대 먹거리, 진정한 블루오션을 찾았다”면서 샴페인을 터뜨렸다. 하지만 불경기가 길어지면서 셰일가스라는 추가 진입자와의 경쟁에서 밀린 석유가격마저 폭락했다. 이에 석유 시추계획들이 모조리 취소가 되고, 시추선 건조도 어려워졌다. 그나마 이미 수주한 공사라도 제대로 진행했으면 다행이련만 처음 만들어보는 해양플랜트이다 보니 여러 문제가 발생했다. 경비도 계약 당시보다 더 들어가면서 대량 손실이 발생했다.
이렇게 한 업종에 거대 재벌들이 다 몰려들면, 수익률이 당연히 떨어진다. 과거 오일쇼크 당시 중동건설 붐 때도 한국기업간의 경쟁으로 수익률이 마이너스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사실 이번 해양플랜트 건도 한국기업간의 경쟁으로 출혈수주를 상당히 많이 하는 바람에 경기의 부침에 따른 주식가격 등락의 정도가 아니라 우리나라의 국가적 위기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필자는 해양플랜트가 그렇게까지 쌈박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큰 배에서 모터를 떼어내고 바다 바닥까지 기둥을 박은 거다. 낚시터에 가보면 물에 나가 있는 의자형 낚시터보다 조금 더 큰 정도다. 그것이 경제성이 없어서 선진국들이 대규모로 하지 않았던 것이지, 고난도 기술을 요구해서 진출하지 않은 게 아니다.
로켓은 돈이 들어서, 그것도 아주 많이 들어서 그렇지 기술로만 본다면 상당히 쉬운 기술이다. 경제성이 없기에 너도 나도 하지 않는 것 뿐이다. 울릉도에서 ‘배를 타고’ 울산으로 오는 것이 경제적이지, 울릉도에서 ‘로켓을 쏴서’ 대기권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울산에 착륙하는 것이(물론 훨씬 빠르겠지만) 경제적이겠는가. 잠시 반짝 호황을 누릴 때도 장기적인 경제성이 없어서 선진국들이 본격적으로 뛰어들지 않은 것인데, 그걸 한국기업들이 블루 오션으로 생각하고 회사의 명운을 걸고 뛰어 들었다. 그래서 회사의 명운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경제성 등을 이유로 선진국에서 진출하지 않던 부분에 진출하여 국내 재벌들이 몰려들어 과열경쟁을 빚은 것. 그게 한국 조선업 비극의 원인이 아닌가 싶다. 세계 여기저기 다녀보면 과거 영광스러웠던 조선소들이 폐허로 변한 흔적을 많이 발견한다. 바로 이것이 조선업이라는 업종이 어느 특정 환경 속에서, 어느 특정 기간만 생존할 수 있는 ‘한철장사’라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한국의 조선업은 지금 업계 전반적으로 대폭 축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한국 조선업의 장기전망을 상당히 어둡다고 본다.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한 몇 종류의 선박 이외에는 이제 접을 시점이, 아니 한참 전에 접었어야 할 것이라 여겨진다.
한 마리의 버팔로는 절대로 절벽에서 뛰어내리지 않는다. 그러나 떼로 몰려가면 수천 마리가 절벽으로 뛰어내린다. 바로 그런 메커니즘이 한국 재벌 간 경쟁구조 속에 본원적으로 내재해 있지 않나 하는 의심을 나는 강하게 한다. 필자는 한국의 재벌간의 치열한 경쟁이 순기능도 했지만, 부작용도 많았다고 본다. 적어도 조선업은 부작용이 더 심했던 것 같다.
이에 더하여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우리나라 산업의 몇몇 분야에서 이렇게 몰빵을 해서 ‘몰망’(沒亡)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구조적 문제가 있다는 거다. 즉 집단지성의 반대인 ‘집단자살 성향’이 있지 않느냐는 우려다.
한국 산업의 구조적 문제점은 어디서 기인하는가? 약간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우리나라 재벌의 성장은 다음과 같은 과정에 따라 이뤄졌다.
? 한국 기업들은 일본이 서구를 추격해 성공한 분야에서 일본보다 더 많은 노동력과 자본을 투입해서 일본의 시장 점유율을 추격해왔다. 즉 정답을 보고 문제를 푸는 형태였다.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는 과정과 더 많은 자본을 투입하는 과정에 자원을 재벌들에게 몰아주던 권위주의적인 정치체제가 필요했던 것이다.
? 뛰어난 관료들의 헌신적인 노력도 기여했다.
? 재벌들도 불철주야 노력도 많이 했다. 징기스칸처럼 살겠다는 재벌 총수들이 여럿 있었다. 그런 재벌총수들이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였던 프로젝트들은 상당 부분 크게 성공했다. 그래서 세계규모의 재벌이 됐다.
? 그러나 창조모델과는 달리 이런 ‘모방-추격모델’은 궁극적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일본에서 성공한 업종을 한국에 이식한다’라는 모델을 따라가는 것은 좋은데, 소수의 국내 재벌들이 경쟁을 하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재벌들 간의 경쟁체제 때문에 과연 이 길이 옳은 길인가, 이 길이 내 길인가 하는 질문을 차분하게 던지는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 나 자신, 나만의 블루오션, 나만의 차세대 먹거리를, 나만의 방식으로, 나의 시점에 맞게, 나의 미래를 위해, 내가 찾아야한다. 그러나 너무 경쟁이 심하면 여유 있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내가 진정으로 뭘 하고 싶은가, 내가 뭘 잘 하나’ 이런 질문들을 훨씬 더 강하게 물었어야 했다. ‘그저 다른 사람이 하고 싶어 하니까’ 이걸로는 안 된다. 개인도 하물며 그러할진대, 대기업들은 다른 기업이 뭘 하면 자기들도 반드시 그걸 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하면 상대도 뛰어들어 경쟁이 더욱 심해진다는 점이다. 길의 옳고 그름은 이미 고려대상이 아니다. 상대보다 더 크게 더 빨리 해야 한다. 그게 궁극적으로 자살골이든 아니든 물을 겨를도 없다. 독 마시기도 경쟁이면 상대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마셔야한다. 따라서 자기만의, 자기에게 꼭 맞는 독특한 영역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여유’를 가질 수 없다.
이처럼 의사 결정과정에 구조적 결함이 있는 섹터가 한국경제 곳곳에 산재해 있다. 그 섹터에는 집단비이성이 존재한다. 사업이고 인생이고 경쟁에 몰려서 억지로 하는 결정치고 제대로 된 결정은 드물다. ‘모 기업에서 해양플랜트 수주를 하는데, 우리가 하지 않고 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골목상권도 (다른 재벌이 먹기 전에) 내가 먹어야 되고, 면세점도 내가 해야 된다.
이는 사회적 분위기에도 반영된다. 나만 해도 대학, 학위 등 과거의 결정들에 대한 과정을 돌이켜 보면, ‘다들 하니까, 다들 하고 싶어하니까….’ 라는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고 싶다’는 심리가 제일 크게 작용했었다. 결과를 떠나서, 이는 결코 옳은 의사결정 과정이라 할 수 없다.
말이 나온 김에 ‘몰빵-몰망’의 구조적 문제가 있는 사회현상을 몇 개 짚어보자. 교육부문이 제일 심각하다. 서열화, 선행 학습 등등…. 3개 고시에 모두 붙은 교육감후보, 하버드와 예일대 그리고 프린스턴에 동시 입학했다는 유학생 등등…. 생각해 보기도 지겨운 괴기스러운 현상이다. 이 부분이 한국인 ‘몰빵-몰망’의 가장 대표적인 섹터임에 틀림없다.
그 다음은 어딜까? 대형 호화아파트다. 나는 한국의 친인척이나 친구들 집을 방문할 적마다 그 호화로움에 놀란다. 크기며, 호화스러운 장식들이며 그들이 잘사는 분들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아방궁에 산다. 아마 이탈리아보다 더 ‘이태리 대리석’을 많이 집 속에 들여다 놓고 살고 있는 게 틀림없다. 수십 년 부동산 호경기의 말미에 대형아파트 가격이 더 올랐는데 그때 건설사마다 더 호화롭고 더 대형 아파트를 짓는 경쟁을 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여왕이 버킹엄궁에 살고, 한국에는 하우스푸어들이 아파트 궁전에 살게 되었다.
슬프다. 이 와중에도 외국 선주들과 해양플랜트 시공자들은 우리나라의 조선사 이곳저곳을 경쟁시켜서 가격을 내렸다. 그렇다면 대기업들이 다음 사업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현문에 우답이다. 점을 쳐서 한다, 기도해서 한다, 아무렇게나 한다, 경쟁자들이 하는 바로 그걸 한다, 전문 컨설팅회사의 조언을 들어서 한다, 구글에 ‘다음 사업’이라고 검색해보고 한다.
위의 어느 것보다 스토리텔링이 더 효과적일 것이라 본다. 이런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런 내가 이렇고 이런 방식으로 이런 저런 사람이 되는 것이 자연스럽고, 그것이 운명이 아니겠는가? 고로 나는 이것을 한다’ 이것이 스토리텔링 방식이다.
거기엔 물론 차분한 자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조용히 자성의 시간을 가지면 자기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고, 경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도 있다. 모두들 국영수 과외공부에 열 올릴 적에 혼자서 바이올린 연습에 열중하는 것, 궁극적으로 그런 사람이 성공한다.
필자는 기업의 의사결정도 그런 식으로 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진정으로 난 누구인가? 이 기업은 무슨 기업인가?’ 차분한 자성과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그래, 따지고 보면 난 아무것도 아냐’에서 시작하는 스토리텔링 바로 그것이다. 모든 개인과 기업과 국가의 역사적 운명과 흥망성쇠는 거기서 시작하고, 그리고 거기서 끝난다.
공자님 옛 말씀에 “세 사람만 있어도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집단지성이란 말도 있다. 여러 사람의 지혜가 한 사람의 지혜보다 낫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집단의사결정이 반드시 옳은 결정은 아니다. 집단이 전부 어려움에 처할 수도 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별 다른 뾰족한 수는 없었을 것이다. 조선회사 가운데 모두들 해양플랜트에 뛰어들 적에 ‘아냐, 이 치열한 경쟁이 가는 방향이 반드시 옳은 방향이 아닐 수도 있어’라는 생각으로 다른 결정을 해서 살아남은 조선사를 한번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그런 결정을 한 분에게 몇 수 지도를 받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