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28일] 한-카자흐스탄 수교 20주년 기념일

2009년 ‘다보스 포럼’ 개막

2009년 1월28일 세계경제포럼(WEF)이 스위스 다보스에서 개막됐다. 블라디미르 푸틴(Putin) 러시아 총리의 개막 연설을 시작으로 5일간의 일정에 돌입한 것. 이번 포럼에선 40개국 정상, 각계 지도급 인사 2500여명이 참석해 총 230여개 세션이 열렸다. 개회 첫날에는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주재하는 특별 세션, 스티븐 로치(Roach) 모건스탠리 아시아 회장 등이 주재하는 ‘새로운 경제 시대’ 세션이 열렸다.

미국 리서치 회사 이노베스트와 캐나다 경제전문지 코퍼릿나이츠는 이날 다보스에서 ‘가장 지속 가능한(sustainable) 기업 100개’를 발표했다. 전 세계 주요기업들의 환경과 사회, 경영 리스크를 평가해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이 높은 기업 100개를 선정한 것.

선정 기업들 중에는 아마존·코카콜라·인텔 등 미국기업이 20개로 가장 많았고, 그 뒤를 영국 19개, 일본 15개로 각각 2위와 3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한국 기업은 한 곳도 없었다.

미국 측 핵심 경제 관료들과 금융위기 직격탄을 맞은 미 대형 금융기관들의 CEO들은 대부분 불참했다.


2003년 이종욱 박사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총장 피선

2003년 1월28일 세계보건기구(WHO) 집행이사회는 “7차까지 가는 접전 끝에 한국의 이종욱 박사(17표)가 벨기에 피요트 후보(15포)를 2표차로 물리치고 극적으로 승리, 제6대 WHO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고 밝혔다. 임기는 5년이었다.

WHO는 유엔산하 전문국제기구 중 가장 크고 중요한 기구중의 하나로 한국인이 국제기구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된 첫 사례였다. 당시 김성호 보건복지부장관은 이종욱 박사 당선을 위해 미얀마, 중국, 브라질 및 일본 등 각국 투표자들을대상으로 끈질긴 설득에 나섰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종욱 박사는 피선 하루 전인 같은해 1월27일 WHO 본부(제네바)에서 개최된 후보 인터뷰에서 “국가별 보건인프라 강화, 6대 지역사무처 기능 강화, 중앙조직 개혁” 등 참신하고 내실 있는 21세기 세계보건 발전 청사진을 제시했다. 또 북한의 보건인프라 구축 및 질병퇴치사업에 대한 기술적, 물적 지원 본격화 등도 약속했다.

이종욱 박사는 사무총장 피선 당시 57세 나이로 WHO 총장 특별 대표 및 결핵관리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카(Scientific American)>는 1996년 1월호에서 이종욱을 “백신의 황제(Vaccine Czar)”라고 칭했다. 보스턴 글로브(Boston Globe)나 뉴욕타임즈(N.Y. Time) 워싱턴포스트(Washington Post) 등에는 지구촌 결핵문제에 대한 멘토로 소개된 바 있다.


1992년 한-카자흐스탄 수교 20주년

1992년 1월28일은 한국과 카자흐스탄이 수교한 날이다.

카자흐스탄은 세계에서 9번째로 큰 나라로 한반도의 13배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자랑한다. 그러나 카자흐스탄 인구는 고작 1570만 명 수준이다. 1991년 12월 구소련으로부터 독립해 석유와 가스, 우라늄 등 풍부한 자원을 바탕으로 2000년대 들어 연 10%에 육박하는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카자흐스탄은 13세기 이래 동ㆍ서를 이어주던 실크로드 상에 자리 잡고 있는 국가다. 유라시아 대륙의 중앙에 위치한 입지를 활용,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교량으로서 발돋움하고 있다.

2012년 현재 카자흐스탄에는 약 50개에 이르는 한국 기업들이 무역, 건설 및 자원개발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2009년 5월 이명박 대통령이 카자흐스탄을 국빈 방문했다. 수교 17년 만에 카자흐스탄과 ‘전략적 동반자관계’를 수립하고 다양한 분야에서 포괄적 협력을 증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카자흐스탄에는 약 10만의 고려인들이 거주하면서 각계각층에서 많은 활약, 존경받는 소수민족으로 성장했고 양국을 잇는 가교 역할을 훌륭히 해내고 있다.

한편 한국의 이명박 대통령은 수교 20주년 기념일을 하루 앞둔 27일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과 수교 2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서한을 교환했다. 이 대통령은 서한에서 한국-카자흐스탄 관계가 1992년 수교 이래 정치ㆍ경제ㆍ문화ㆍ인적교류 등 다방면에서 꾸준히 발전해온 데 대해 만족감을 표시하고 중앙아시아 핵심 국가들인 두 나라와의 미래지향적인 관계 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협력해나가기를 희망했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은 정상간 신뢰와 우정을 바탕으로 전략적 동반자 관계가 발전해가고 있는 데 만족을 표하며 앞으로도 주요 경제프로젝트 협력 등 우호협력관계가 더욱 강화될 것으로 기대했다.

1932년 상하이사변?

1932년 1월28일 중국 상하이 국제 공동조계 주변에서 중일 양군이 충돌한 ‘상하이사변’이 일어났다. 5년 뒤인 1937년에 일어난 제2차 중일전쟁이 발발하기 전에 전초전 성격을 지닌 충돌이었다.?

만주사변으로 일본은 상하이 북동쪽의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고, 괴뢰정부인 만주국을 수립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서양열강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위해, 조계지를 가지고 있는 상하이 지역에 눈독을 들였다. 그래서 대의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무언가 돌파구가 필요했다.?

1월18일 다섯 명의 일본인 승려가 삼우실업사(三友實業社) 근처에서 성난 중국 군중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범행은 일본 측에 고용된 중국인에 의한 행위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1월20일 상하이 거주 일본인들이 항의 데모를 벌였고, 일부 청년들이 삼우실업사 공장을 불태우고, 한 명을 살해했다.?

진압을 위해 파견된 중국 관원 2명을 일본도로 살해하고, 일본인 1명도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상하이 시민들의 반일 감정을 자극, 일본 제품의 보이콧을 외치며 항의 행진을 벌이게 만든다. 이 사건으로 일본을 포함한 서양열강은 협의를 통해, 공동 조계 내의 경비를 분담하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무라이 구라마쓰 총영사는 오철승 상하이 시장을 면담하고, 손해배상과 더불어 사건에 관한 진상조사와 가해자 처벌 및 항일 단체의 해산 등을 요구했다. 이에 상하이시장 측은 즉답을 미뤘지만, 결국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일부 학생들이 분개, 시청을 습격했다. 1월27일 일본군은 30척의 함정과 40기의 전투기를 동원, 상하이 해안 근처에 7000 명 정도의 부대를 집결시켰다.?

드디어 1월28일 오후 5시. 조계국은 마침내 계엄령을 선포했다. 서양열강의 군대가 각자의 담당 경비 구역에 도착했다. 당시의 일본의 병력은 1000명이 넘었고, 9시30분경 군함에서 1700명이 추가로 상륙, 총 2700명이 주둔했다.?

당시 상하이에는 국민당 정부의 채정해를 사령관으로 하는 약 3만3000명의 19로군 병력이 있었다. 사태가 악화되자 19로군은 조계의 요소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 황푸 강(?浦江) 유역에 포대를 설치했다.?

1월28일 자정 중국과 일본 양군이 북사천로에서 충돌이 시작됐다. 일본군은 치열한 공격에도 불과하고, 개전 3일 만에 본국 증원군을 요청하게 되고 2월1일 해군 사령부는 2개의 육군 부대를 증파, 제3함대를 편성해 해군병력을 지원했다. 다시 19로군의 완강한 저항에 막히자, 일본은 일본 제국 육군 9사단을 주력으로 한 병력을 증파, 16척의 수송선에 나눠 15~16일 상하이 항과 오송부대에 상륙했다.?

9사단장 우에다와 19로군 군단장 채정해는 영국이 주선한 중일 양국군 대표 회담을 통해, 입장을 조율하려 했지만 일본의 음모에 의한 전쟁이기 때문에 양측의 간극은 좁힐 수가 없었다. 결국 2월10일 다시 양군이 충돌했다. 일본은 19로군의 방어를 뚫지 못해서 또 한차례 증원을 본국에 요청, 일본에서 다시 2개 사단이 증파된다.?

3월1일 선방하던 중국군이 갑자기 철수를 시작했다. 청나라 숙친왕의 딸인 금벽휘라는 여인의 농간에 놀아났다는 설이 있다. 금벽휘는 당시 일본군 특무기관의 소좌 다나카에게 포섭돼 일본군이 또 증파된다는 거짓 정보를 중국군 지휘관들에게 흘려 철수를 유도했다고 한다. 금벽휘는 1948년 장제스에 의해 총살 당했다.?

19로군 철수로 상하이는 군대의 무장해제를 당했고, 자국의 군대를 상주시키지 못하는 지역이 됐다.?

중국의 패전의 분위기 속에서 중일 양국이 정전협정을 맺기 전인 1932년 4월29일 일본인 거주민들은 홍커우 공원에서 열병식을 거행했다. 일본 천황의 천장절 경축행사와 일본군 승전 파티를 겸한 행사였다.?

이날 한국인 독립투사였던 윤봉길이 폭탄을 투척, 상하이 일본영사와 해군 중장 등이 죽거나 다쳤다. 윤봉길은 체포돼 사형을 당했고,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아주 통쾌하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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