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설화 속의 여인들 ④] 아버지 화려한 명성과 힘도 헛되이

폴릭세네의 희생
폴릭세네의 희생

‘희생제물’ 된 헤라클레스 딸 마카리나와 트로이 왕녀 폴릭세네

[아시아엔=차기태 기자] 그리스 신화가 배출한 최고의 영웅은 헤라클레스이다. 제우스 신과 알크메네 사이에 태어난 헤라클레스는 불운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자식을 죽이고 12가지 고역을 치르면서 초인의 힘을 과시했다. 단순히 힘을 과시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세상의 안정과 평화를 해치는 무뢰배들을 퇴치했다. 제우스 신을 비롯한 올림포스의 신들이 거인신들(기간테스)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졌을 때 그들을 구출해 준 것도 다름아닌 헤라클레스였다. 헤라클레스는 뜻하지 않게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다. 스스로 장작더미에 올라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그야말로 영웅다운 죽음이었다.

헤라클레스에게는 자식도 몇 있었다. 그러나 자식들은 아버지의 명성과 힘의 후광을 누리지 못했다. 오히려 더 불행해졌다. 아버지 헤라클레스에게 12가지 고역을 떠맡겼던 에우리스테네스가 이제 자식들을 괴롭혔다. 자식들에게는 헤라클레스 같은 강력한 보호막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러니 에우리스테네스는 마음 놓고 자식들을 박해했다. 때문에 자식들은 그리스 이곳 저곳으로 피난다녀야 했다. 이들의 피난과정에는 할머니, 즉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알크메네도 동행했다. 헤라클레스의 4촌이자 헤라클레스의 고역수행을 도운 동반자 이올라오스도 함께 했다. 그렇지만 어머니 알크메네도 이올라오스도 이제는 늙어 힘을 쓸 수 없었다. 이 때문에 헤라클레스의 자식들은 여러 도시국가를 떠돌아다니며 ‘선의’의 보호에 운명을 맡길 처지가 되었다.

이들은 아테네로 들어가 제우스신전에 피신해 있었다. 아테네에도 이미 영웅 테세우스가 사라지고 그의 아들 데모폰이 통치하고 있었다. 에우리스테네스가 아르고스의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로 접근했다. 에우리스테네스는 전령을 보내 헤라클레스의 자식들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자도 불운에 제압된다는 것을 나는 지금 똑똑히 보았나이다.
이들은 훌륭한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만 부당하게 고통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에우리피데스 <헤라클레스의 자녀들>

데모폰은 처음에는 거부했다. 탄원하는 이방인을 넘겨준다는 것은 용인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우리스테네스가 군사적인 압박을 강화하자 데모폰도 흔들렸다. 더욱이 아테네의 예언자들이 귀한 집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만 에우리스테네스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데모폰은 참으로 곤란했다. 에우리스테네스의 요구를 거절하기에는 벅찼고, 그렇다고 죄없는 처녀를 제물로 바치는 것도 차마 할 일이 아니었다. 데모폰이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헤라클레스의 딸이 나섰다. 자신이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겠다면서.

그대들은 이 몸을 죽어야 할 곳으로 인도하여 화관으로 장식하고 그대들 좋을 대로 신께 바치세요!
나는 목숨에 집착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아름다운 것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영광스럽게 죽는 거예요.
에우리피데스 <헤라클레스의 자녀들>

이렇게 해서 헤라클레스의 딸 마카리나는 가족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
아버지는 화려한 명성과 힘을 자랑했지만, 딸은 참혹한 희생제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너무나 쓰라린 운명의 장난이었다.

신들의 의지 없이는 어떤 인간도 행복하거나 불행할 수 없다네.
또 같은 집안이 언제까지나 행복을 누릴 수도 없다네.
상반된 운명이 번갈아 그 집안을 뒤쫓는다네.
에우리피데스 <헤라클레스의 자녀들>

에우리피데스의 이 작품에서 노인들로 구성된 합창단도 노인 이올라오스에게 마카리나의 죽음에 대해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영광스런 죽음이라면서.

이올라오스여, 그대는 똑바로 일어서서 신들의 뜻을 참고 견디고, 고통으로 마음을 지나치게 괴롭히지 마시구려.
가련한 처녀는 영광스런 죽음을 죽는 것이오.
오라비들과 조국을 위해.
그녀는 후세 사람들에게서 큰 명성을 얻게 될 것이오.
미덕은 고난의 길을 걷는 법.
그녀의 처신은 그녀의 아버지와 그녀의 좋은 가문에 어울리는 것이오.
그대가 용감한 사람들의 죽음에 경의를 표한다면, 나도 그대와 동감이오.
에우리피데스 <헤라클레스의 자녀들>

마카리나의 희생이 효험을 보았는지 전세는 일변했다. 다른 도시국가의 도움을 구하러 떠났던 헤라클레스의 장남 휠로스는 지원군과 함께 돌아왔고, 늙은 이올라오스도 기적적으로 젊음의 원기를 회복했다. 이에 힘입어 아테네와 헤라클레스 가족은 에우리스테네스의 아르고스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뒀다. 이올라오스는 에우리스테네스를 포로로 잡았다. 그러자 헤라클레스의 어머니 알크메네는 에우리스테네스를 사형에 처하라고 요구했다. 에우리스테네스가 헤라클레스가 살아있는 동안 갖은 시련을 안겨준 데 이어 사후에도 그토록 큰 고통을 안겨줬으니 원한이 사무쳤던 것이다. 결국 에우리스테네스는 사형에 처해졌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 폴릭세네도 자신에게 강요된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했다. 폴릭세네는 왕의 딸로서 부러울 것이 없이 자랐다. 그렇지만 그녀의 운명은 트로이의 패전과 함께 급전직하했다.

트로이의 패전으로 가련한 운명으로 전락한 사람은 많았다. 왕비 헤카베는 오디세우스에게 전리품으로 분배됐고, 예언녀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의 몫이 됐다. 그렇지만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은 바로 공주 폴리세네였다. 아킬레우스의 무덤 앞에서 제물로 바쳐진 것이다. 전사한 그리스 연합군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요구했기 때문이다.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이 휘하 장병들과 함께 출항하려고 할 때 죽은 아킬레우스의 혼이 나타나 마지막 ‘명예의 제물’로 폴릭세네를 바치라고 요구했다. 그리스군은 자신들의 무사귀환을 위해 아킬레우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그리스군은 폴릭세네를 함께 있던 어머니 헤카베로부터 빼앗아 아킬레우스의 무덤으로 끌고 갔다. 폴릭세네는 무덤 앞에서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의 손으로 살해됐다.

그런데 이때 폴리세네의 태도는 당당했다. 아킬레우스 무덤 앞에 설치된 제단으로 끌려갈때나 칼을 받고 쓰러져 죽는 순간에도 담대한 표정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 그리고 분명한 어조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알아두시오.
나 폴릭세네는 누구의 종노릇도 하고 싶지 않고 이따위 의식으로 그대들은 어떤 신도 달랠 수도 없을 것이오.
오비디우스 <변신> 13권

그녀의 당당한 모습은 적군이었던 그리스군의 사제들까지도 눈물을 흘리게 했다. 그녀의 어머니 헤카베도 딸이 죽음을 침착하게 맞이했다는 소식을 아가멤논의 전령 탈티비오스로부터 들었다. 그러자 헤카베는 비탄에 빠지지 않고 딸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네가 고매한 태도를 보였다는 말을 전해 들으니 과도하게 비탄할 마음이 내키지 않는구나.
고귀한 자는 고귀한 자로 남아 어떤 불행에 의해서도 본성이 파괴되지 않고 항상 선하다. 에우리피데스 <헤카베>

마카리나와 폴릭세네의 죽음에 관한 설화는 삶과 죽음에 관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관념을 엿보게 한다. 죽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당당하게 감수해야 한다는 의식이 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것을 명예로운 죽음이라고 생각한 듯하다. 결코 억지로 비굴하게 연명하려 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불명예로 간주되었을 것이다. 특히 집안이 좋고 책임있는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나 그의 가족들은 명예를 죽음보다 더 소중히 한 것 같다. 또 그런 관념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대동소이했다.

그렇기에 철인 소크라테스나 장군 포카이온이 모두 부당한 사형선고를 받고 부당하게 죽음을 당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깨끗이 받아들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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