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설화 속의 여인들 ③] 아버지의 ‘승리욕’에 희생된 딸들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니아와 입다의 외동딸
[아시아엔=차기태 기자] 헬레네를 납치하기 위해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이 아울리스 항에 집결해 있을 때였다. 총사령관 아가멤논의 맏딸 이페게네이아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이 말을 마치고 이피게네이아는 ‘용감하게’ 제단으로 갔다. 그녀는 제단에서 머리에 화관을 쓰고 예언자 칼카스의 칼을 받았다. 말하자면 그리스 연합군을 위한 희생제물이 된 것이다.
이피게네이아가 이렇게 희생제물이 된 것은 여신의 요구 또는 예언자 칼라스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그리스 연합군이 트로이 출정을 위해 아울리스 항에 집결했지만, 강한 역풍이 불어 출항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군이 전속 예언자 칼카스에게 해책을 물었더니 그는 아가멤논의 딸을 아르테미스 여신에게 제물로 바쳐야 한다고 요구했다. 아가멤논이 사냥할 때 사슴을 쏘면서 ‘아르테미스도 이처럼 잘 쏘지는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바람에 아르테미스 여신이 노여워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서는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신탁’이었다.
그러자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를 영웅 아킬레우스와 결혼시키기로 했다고 속여서 이피게네이아를 데려왔다.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도 아가멤논의 감언이설에 속아 딸 이피게네이아를 내주고, 자신도 진중으로 찾아갔다. 이렇게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치는 희생의식만 치르면 되는 상황이었지만, 아가멤논은 고심을 거듭했다.
아버지로서의 사랑과 총사령관이라는 직책이 요구하는 책임감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다. 헬레네의 남편으로서 이번 원정의 가장 중요한 이해당사자인 메넬라오스도 아가멤논을 보면서 측은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죄책감도 있었을 것이다. 하여 아가멤논에게 원정대를 해산하고 돌려보내라고 권고했다.
막사에 온 이피게네이아의 어머니 클리타이메스트라 역시 남편 아가멤논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딸을 죽이지 말라고 요구했다.
당신은 자식을 제물로 바치며 뭐라고 기도할래요?
수치스런 출발에 걸맞은 비참한 귀향을 빌래요?
내가 당신을 위해 복을 빌어주기를 바라세요?
에우리피데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게다가 희생대상이 된 이피게네이아 역시 아버지 아가멤논의 무릎을 붙잡고 자신을 죽이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다.
때가 되기도 전에 저를 죽이지 마세요.
햇빛을 보는 게 저는 달콤해요.
땅 밑을 보도록 저를 강요하지 마세요.
에우리피데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끝내 자신의 딸을 제물로 바치기로 결심하고 아내 클리타임메스트라와 이피게네이아에게 이야기했다. 이번 일을 감행하기가 두렵지만 감행하지 않기도 두렵다고. 수많은 그리스 군사가 항구에 청동 무구로 무장하고 집결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이 이번 신탁을 무시하면 벌어질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스 군사들이 자신과 클리타임메스트 등 가족들을 모두 죽일 것이라고. 아가멤논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피게네이아를 제물로 바칠 수 밖에 없고. 여기에 맞설 힘이 없다고 토로했다.
얘야, 너와 내가 할 수 있는 한, 헬라스는 자유로워야 하며 우리는 헬라스인인 만큼 야만인들이 우리의 아내들을 억지로 납치해 가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된다.
에우리피데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아가멤논이 이렇듯 나름대로 논리를 갖춰 직접 ‘설득’하자 이피게네이아의 마음도 움직였다. 결국 그녀는 죽음을 받아들이겠다고 결심했다.
아르테미스가 제 육신을 바치기를 요구하는데, 인간인 제가 어찌 여신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어요?
그건 안될 말이예요. 헬라스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어요.
에우리피데스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
오비디우스가 <변신>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공공의 이익’이 ‘아버지의 정’을 이기고 ‘왕’이 ‘아버지’를 이긴 것이다. 이피게네이아는 동생 오레스테스를 마지막으로 포옹해 주고 제단으로 스스로 걸어가서 칼을 받았다.
그런데 일설에 따르면 이피게네이아가 칼을 받는 순간 아르테미스 여신이 사슴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 사슴이 대신 칼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르테미스 여신은 이피게네이아를 데려가 자신의 여사제로 삼았다고 한다. 구약성서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야훼에게 제물로 바치려 할 때 야훼가 사슴을 대신 보냈다고 하는 대목과 너무나 비슷하다. 에우리피데스와 오비디우스의 작품에도 이런 이설이 제시된다.
이피게네이아는 칼을 받으러 가기 전 어머니 클리타이메스트라에게 눈물을 보이지 말고 아버지도 미워하지 말라는 당부를 남겼다. 이런 당부에도 불구하고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아가멤논과 어머니 클리타이메스트라는 모두 복수극의 희생제물이 된다. 전쟁을 끝내고 돌아온 아가멤논은 이피게네이아의 어머니 클리타임네스트라에 의해 살해된다. 이피게네이아의 희생에 복수하는 것이 명분이었다. 클리타임네스트라는 다시 아들 오레스테스와 딸 엘렉트라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이들 남매는 아버지를 죽인 책임을 묻는다며 어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이 때문에 오레스테스는 복수의 여신들로부터 집요한 추적을 받는다.
이피게네이이아의 희생 설화를 소재로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와 <아울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썼고, 19세기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괴테는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를 창작했다. 에우리피데스의 <타우리케의 이피게네이아>와 괴테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는 이피게네이아가 제물로 희생되려는 찰나에 아르테미스 여신이 그녀를 빼돌렸다는 설화의 후속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 이피게네이아는 타우리스지방의 아르테미스 신전 사제로 봉직하던 중 어머니 클리타이메스트라를 살해하고 피신한 동생 오레스테스와 해후한다. 타우리스 지방은 오늘날 크리미아 반도에 있는 지역이다. 이피게네이아는 오레스테스를 제물로 바치라는 타우리스 왕의 요구를 물리치고 동생과 함께 탈출한다. 이피게네이아의 불행한 운명은 그리스 신화의 많은 에피소드 가운데 가장 슬픈 장면 가운데 하나이지만, 에우리피데스와 괴테에 의해 아름다운 드라마로 승화된 셈이다.
이피게네이아 이야기는 구약성서 <판관기>에 나오는 입다의 딸과 유사하다. 길르앗이라는 곳에 살던 유대인 입다에게는 외동딸이 사람이 있었다. 그는 힘센 장사였지만 창녀의 몸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과 멸시를 받고 자랐다. 더욱이 아버지 재산도 상속 받지 못하고 쫓겨나 비적떼의 두목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암몬 사람들이 유대인들을 공격하자 길르앗의 원로들이 입다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를 수령 겸 사령관으로 받들겠다면서. 입다는 처음에는 “쫓아낼 때는 언제이고 이제는 어려워지니까 찾아오느냐?”며 거절하다가 결국 수락했다.
입다는 출정하기 전 하느님 야훼에게 맹세했다. 암몬군을 무찌르도록 도와준다면 귀환할 때 집 앞에서 자신을 맞이하러 처음으로 나오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고. 그런 맹세가 있었기 때문인지 입다가 지휘하는 유대인 군대는 암몬군을 격파했다.
입다는 전투가 끝나고 귀가했다. 그런데 웬일인가? 집 앞에서 자신의 외동딸이 자신을 가장 먼저 반기는 것이 아닌가? 야훼에게 이미 맹세한 것을 뒤집을 수도 없었다. 결국 입다는 외동딸을 번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었다.
아이고, 이 자식아, 네 가슴에 칼을 꽂는구나.
내가 입을 열어 야훼께 한 말이 있는데, 천하 없어도 그 말은 돌이킬 수 없으니 이를 어쩌란 말이냐? <판관기> 11장
입다의 외동딸도 이피게네이아처럼 의연하게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다만 2개월동안 친구들과 함께 숲 속에 들어가 울고난 뒤 집으로 돌아가 희생제물이 됐다. 입다는 6년동안 판관을 맡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가멤논과는 달리 그 누구의 보복도 받지 않고 비교적 평온하게 일생을 마친 셈이다.
이피게네이아와 입단의 딸은 아버지에 의해 희생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녀들의 아버지는 모두 사령관의 중책을 맡아 부녀간의 정을 끊어 버렸다. 아버지들의 결정은 전쟁에서의 승리와 영광을 위해 자신의 딸들을 희생시킨 것이다. ‘야욕’을 위해 자연이 맺어준 정을 더럽힌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