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설화 속의 여인들 ①] ‘이 운명에서 저 운명으로’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

포로가 된 안드로마케

거듭되는 불행 속에서도 당당했던 안드로마케

[아시아엔=차기태 기자]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안드로마케>의 서두에서 주인공 안드로마케는 이렇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안드로마케는 그리스 신화에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의 공격을 받고 멸망한 트로이 왕국의 장수 헥토르의 아내였다. 헥토르는 트로이 왕국의 왕자이면서 그리스군과 맞서 싸우는 트로이 왕국 최고의 장수였다. 안드로마케는 트로이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왕비가 되고 최고의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그녀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고 말았다.

호메로스가 쓴 인류 최초의 서사시 <일리아스> 제6권에 따르면 안드로마케는 이미 그녀의 아버지 에에티온과 오라비 7명을 모두 아킬레우스에게 피살당했었다. 어머니도 이때 또다른 불운으로 죽음을 당했다. 아킬레우스가 안드로마케의 고향인 킬리키아의 도시 테베를 함락시켰을 때였다. 그렇기 때문에 헥토르는 안드로마케에게 단순한 남편이 아니었다.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고, 오라비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소중했던 헥토르가 최후의 결전을 위해 출정하기에 앞서 마지막으로 만나고 헤어질 때 안드로마케는 몹시 통곡했다. 헥토르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안드로마케는 헥토르의 죽음으로 트로이 왕국이 패망하고, 자신과 아들의 운명도 비참해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사태는 그런 예감대로 진행됐다.

헥토르는 그리스군을 맞아 직접 전투를 벌이거나 트로이군을 총지휘하면서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혼자서 트로이를 지킨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헥토르는 그리스군의 영웅 아킬레우스와 1대1로 맞붙었다가 전사했다. 그리스군은 그의 시신을 전차에 매달고 끌고다니는 등 능욕했다. 아버지 프리아모스 왕이 직접 그리스군 진영에 찾아가서 아킬레우스에 간청한 끝에 그의 시신을 되찾았다.
헥토르의 시신이 돌아오자 아들 아스티아낙스와 함께 슬프게 울었다.

“낭군이여! 당신은 아직 젊은데 목숨을 버리고 나를 당신 집에 과부로 남겨놓으시는군요….
당신은 부모님에게 말할 수 없는 비탄과 슬픔을 주셨어요.
하지만 누구보다도 내게 쓰라린 고통이 남게 될 거예요.”
호메로스 <일리아스> 제6권

이런 예감대로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군은 ‘승자의 권리’를 마음껏 행사했다. 헥토르의 아들 아스티아낙스를 성벽에 내던져 살해했고, 안드로마케를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노예이자 첩으로 내줬다.
뿐만 아니라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는 트로이성을 함락시킬 때 안드로마케의 시아버지이자 트로이의 왕이었던 프리아모스를 살해했다. 그러니 아킬레우스와 네오프톨레모스는 안드로마케에게는 ‘원수’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제 그 네오프톨레모스에게 노예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안드로마케는 또다시 탄식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행복하다고 불러서는 안돼.
그가 죽은 뒤, 그가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내며 저승으로 내려갔는지 보기 전에는. 에우리피데스 <안드로마케>

이런 탄식은 단순한 탄식은 아니다. 인간의 삶과 행복에 관한 진실을 잘 드러내 주는 말로서, 고대 그리스에서 폭넓은 공감을 얻었던 행복관이기도 하다. 입법자 솔론을 비롯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의 철인들도 이런 행복관을 강조했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도 그런 행복관을 다시 피력한 것이다.

그녀의 탄식대로 얼마나 가혹한 운명인가! 인간에게 이렇게 굴욕적인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드로마케는 꾹 참았다. 순순히 끌려갔다. 전락한 운명을 감수했다.

안드로마케의 삶은 그리스로 끌려간 이후에도 굴곡이 심했다.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노예로서 궂은 일을 다하면서 그의 첩 신세가 되었다. 그 결과 아들 몰로소스를 낳아준다. 이 때문에 도리어 네오프톨레모스의 정실부인 헤르미오네와 그녀의 아버지인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왕에게 미움을 산다. 메넬라오스와 헤르미오네는 안드로마케가 네오프톨레모스의 사랑을 가로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헤르미오네는 안드로마케가 약물을 써서 자신에게 불임을 야기했다고 몰아세웠다. 두 부녀는 안드로마케와 아들 몰로소스를 모두 죽이려고 한다. 안드로마케는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다. 자신의 원래 남편을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이번에는 그녀의 은인이 되어 준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자 남편 노릇을 하던 네오프톨레모스는 델포이 신전에 갔다가 헤르미오네의 원래 약혼자였던 오레스테스에 의해 피살당한다. 안드로마케는 또다시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안드로마케에게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다. 안드로마케처럼 역시 노예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아 있던 트로이의 왕자 헬레노스와 결혼한 것이다. 안드로마케는 헬레노스와 함께 몰로시아에서 트로이와 닮은 성을 세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불행이 거듭된 끝에 행운이 찾아온 셈이다.

가여운 여인이여!
너희들은 사나운 폭풍을 만났다가 잔잔한 항구에 도착했노라. 에우리피데스 <안드로마케>

그러던 그들에게 그야말로 극적인 한 순간이 있었다. 지중해를 유랑하다가 일시 상륙한 트로이의 또다른 영웅 아이네아스와 조우한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해후였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안드로마케는 아이네아스를 보는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하고 거의 졸도할 뻔했다. 그래서 앞에 나타난 아이네아스에게 정말로 그 아이네아스인지 묻는다.

내게 다가오고 있는 그대는 진실로 그대 자신인가요? 그대가 진실로 내게 소식을 전하러 오는 것인가요, 여신의 아들이여? 그대는 살아 있는 것인가요?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3권

안드로마케는 울음을 터뜨렸다. 너무도 기막힌 해후였고 그간 겪었던 온갖 고생과 역경의 기억들이 되살아나며 한꺼번에 눈물로 쏟구쳐 나왔다. 아이네아스도 미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 여신의 아들이었지만, 패망한 트로이를 탈출한 후 지중해 바다를 떠돌아다니며 온갖 시련을 겪었다. 이 때문에 아이네아스도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뜻하지 않은 해후의 기쁨이 얼마나 컸을까? 미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두 사람은 그동안 겪었던 일을 모두 서로 이야기해준다. 세 사람은 그로부터 며칠동안 함께 머무르면서 회포를 푼다. 그렇지만 아이네아스는 신들에 의해 주어진 운명에 따라 다시 배를 타고 유랑의 길에 오른다. 아이네아스는 떠나기 전 다정한 작별의 말을 남긴다.

그대들은 행복하게 오래 사시오.
그대들의 운명은 이미 성취되었소.
하나 우리는 이 운명에서 저 운명으로 끊임없이 부름을 받고 있소.
그대들에게는 안식이 주어졌오.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3권

이들 세 사람은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헤어질 때도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3권에 나오는 이들의 해후와 작별의 장면을 읽다보면 함께 눈물짓게 된다.
안드로마케는 가슴 아픈 일을 너무나 많이 겪었다. 안드로마케야말로 ‘이 운명에서 저 운명으로’ 끌려다녔다. 그녀는 그 모든 불행과 불운을 참고 견뎠다. 결국에는 안정과 평화를 얻게 된다. 그러므로 안드로마케는 불행하지만 가장 불행한 여인은 아니었다. 더욱이 안드로마케는 불행이 연속되는 가운데서도 그 불행을 당당하게 맞이했다. 안드로마케는 자신을 의심하고 몰아내려던 메넬라오스의 딸 헤르미오네에게 “남편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미색이 아니라 미덕”이라고 일침을 가한다.

네오프톨레모스의 장인이자 스파르타의 왕이었던 메넬라오스가 자신을 죽이려고 할 때에도 안드로마케는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하게 맞서면서 교만하지 말라고 메넬라오스에게 경고한다.

죽일 테면 죽여요!
나는 그대와 그대의 딸에게 결코 아부의 말은 하지 않을 거예요.
그대가 스파르타에서 위대하다면, 나는 트로이에서 위대했으니까.
내가 지금 불운하다고 해서 그대는 우쭐대지 말아요. 그대도 불운해질 수 있으니까요. 에우리피데스 <안드로마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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