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50년②재일동포] 전후 연합국 무관심·남북한-일본 역학관계 속 ‘부평초 신세’

[아시아엔=문경수 리쓰메이칸대 교수] 재일조선인(재일한국인)은 동질성과 응집력이 유독 높은 남한과 북한 그리고 일본 사이에 끼어 ‘국민’과 ‘민족’이라는 강력한 자기장 속에 버텨온 ‘마이너리티’로 꼽힐 것이다. 특히 2차 세계대전 후반부터 일본이 고도성장을 이룩한 60년대까지 재일조선인들은 국민과 국적의 논리에 의해 점차 배제되면서 한편으로는 포위돼 갔다.

일본과 한반도 사이에 끼여 살아가는 재일조선인에게 한일 두 사회는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연합국사령부 명확하고 일관된 정책 없어 재일동포 고통 심화

조선인의 일본 도항이 본격화된 것은 제1차대전의 군수경기로 들끓던 1910년대 후반 무렵부터다. ‘강제연행’이라 비난받는 전쟁시기의 조선인 노동자의 대량동원은 1939년 시작됐으나 이미 그전까지 80만명 이상의 조선인들이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본 패전 이후 1년여 약 150만명의 조선인이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1930년대 이미 일본에서 터를 잡은 이른바 ‘정주자’(定住者)들은 일본에 뿌리내리며 1945년 해방이라는 극히 유동적인 상황에서 조선사람이라는 정체성과 현재 살고 있는 거주지 가운데 선택해야 하는 갈림길에 놓이게 됐다.

더욱이 점령군인 연합국총사령부(GHQ)는 재일조선인이 어떠한 지위에 놓여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하고도 일관된 인식이나 정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치안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뿐이었다.

자연히 재일조선인의 국적문제는 일본정부에게 맡겨지게 됐다. 이에 따라 법적으로는 여전히 일본국민이었지만 선거권은 갖지 못했다. 1945년 12월 중의원선거법 개정에서 시작해 이른바 ‘간주규정’(見なし規定)을 통해 재일조선인은 외국인 관리 하에 둔 외국인등록령의 제정(47년 5월)을 거쳐 샌프란시스코단독강화 발효(52년 5월)와 함께 옛 식민지출신자의 일본국적 상실을 선언한 ‘법무부민사국장통달’(평화조약 발효에 따른 조선인·타이완인 등에 관한 국적 및 호적사무의 처리)을 거치며 ‘외국인화 과정’을 밟게 된다.

법무부민사국장통달에 따라 국적을 상실하는 ‘구 식민지출신자’의 기준으로 간주된 것은 호적이었다. 식민지 시기에는 같은 ‘일본신민’이면서도 조선인은 호적상 ‘외지적(外地籍)’(1923년의 조선호적법 제정 이후에는 ‘조선호적’)으로 차별당하는 존재였다. 조선호적은 해방 이후 미 군정과 1948년 5월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와 그해 12월 제정된 부계혈통주의에 근거한 국적법에서도 한국인이라는 기준으로 사실상 그대로 유지됐다.

한일회담은 일본이 연합국 점령 하에 있던 1951년 10월 예비회담으로 시작되는데 회담에서는 당초 식민지지배의 평가를 둘러싸고 한일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재일조선인의 국적과 법적 지위에 관해서도 한일간의 이견은 처음부터 컸다. 한국측은 45년 8월9일 이전에 일본에 거주하던 재일조선인에 대한 내국민 대우와 영주권 부여를 요구한 데 반해 일본측은 일반 외국인과 마찬가지로 ‘출입국관리령’의 적용과 일본 국적법에 의거해 귀화에 의한 국적 취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일본정부는 한국측의 주장에 상관없이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발효와 동시에 옛 식민지출신자의 일본국적 이탈조치를 일방적으로 강행하였다. 일방적인 통달에 의해 외국인으로 전락한 재일조선인은 당분간의 체류는 허용되었지만 국외로의 강제퇴거규정을 담은 출입국관리령(51년 10월 공포) 대상이 되어 외국인등록증의 상시 휴대와 지문날인(1955년의 외국인등록법 개정에 따라 도입)이 의무화되기에 이른다.

일본국적을 상실함으로써 조선인은 국가·지자체의 직원은 물론 국영철도나 우체국 등 공공기관에도 적을 둘 수 없게 됐다. 더욱이 ‘국적조항’에 의해 공영주택 입주를 비롯해 거의 모든 사회복지제도 적용대상에서 배제되었다.

당시 한층 고조돼 있던 조선인에 대한 반감까지 맞물리면서 취직 차별은 2차대전 이상으로 심각해졌다. 대부분의 재일조선인은 ‘실대일용’(失對日庸, 실업대책사업일용직노동) 등으로 생활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1956년 단행된 일본정부의 대대적인 보호중단 조치로 종전 24%에서 13% 이하의 재일조선인만이 보호대상자에 포함됐다.

재일조선인 21세기 중엽쯤 거의 소멸될 듯

이같은 상황에서 1954년 8월 “일본 거주 조선인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이다”라며 권리 보장을 요구하는 북한 남일(南日) 외무상의 성명이 발표됐다. 이 성명은 극한의 빈곤과 차별에 처해 있던 재일조선인 주민들에게 강한 희망을 던져 주었다. 이듬해인 1955년 5월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의 결성은 북한정부의 성명에 호응하여 재일조선인이 ‘해외공민’으로서의 귀속을 뚜렷하게 내세웠음을 뜻한다. 즉 일본정부가 재일조선인의 정주자로서의 생활실태를 무시하고 일률적으로 ‘외국인’으로 취급한 데 대해 재일조선인측이 스스로 ‘외국인’으로 자처하게 된 것이다.

조총련은 ‘재외공관’ 혹은 ‘주일대표부’ 역할도 담당했다. 조총련이 개입하면서 북한과 일본의 혁신세력 사이의 우호·연대운동은 갈수록 고양되었고 이윽고 재일조선인의 북한 귀국운동이 시작됐다. 조총련의 전성기였던 셈이다. 60년대 초반 조총련 산하 동포수는 20만명 정도로 6만~7만명 수준이던 민단 세력을 압도했다. ‘공화국공민’으로서 주장된 ‘국민’의 논리는 한반도 남쪽에 고향을 둔 10만명 가까운 재일조선인이 북한으로 대량 귀환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한편 1961년 국가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한 박정희 장군은 취임 후 첫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을 연내에 타결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같은 해 8월 시작된 제6차 한일협상에서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와 관련하여 현안이던 영주권문제에 대하여 재일조선인의 자손에게 영원히 영주권을 부여하는 대신 협정 체결 이후 상당기간 동안 출생한 자손에게는 영주권을 부여하고 그 후에 출생하는 자손에 대해서는 그 시점에 영주권문제를 재검토한다는 절충안을 제시했다.

마침내 65년 6월 체결된 한일 국교정상회담은 과거청산 문제는 보류되고 이에 따라 재일조선인의 처우에도 별 진전을 보지 못했다. 제7차 한일협상의 일본 측 수석대표인 다카스기 신이치는 식민지지배는 “선의로 했다”고 발언하면서 14년간의 협상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의 과거사 인식에는 여전히 일말의 변화도 없음을 드러냈다.

다카스기는 특히 “창씨개명도 좋았다.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인과 똑같이 대우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로 착취라든가 압박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이러한 다카스기의 동화주의는 조약 발효와 동시에 발표된 민족교육에 관한 2개의 ‘문부사무차관통달’(법적지위협정에서의 교육관계 사항의 실시에 대하여’ 및 ‘조선인만을 수용하는 시설의 취급에 대하여’)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통달은 재일 어린이들을 “일본인 자녀와 동일하게 다룬다”는 명목 아래 일본인 학교의 민족학급을 부정하였다.

한일회담에서 재일조선인을 둘러싼 최대 현안은 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를 둘러싼 것이었다. ‘법적지위협정’(재일조선인의 법적 지위 및 처우에 관한 대한민국정부와 일본국정부의 협정)은 ‘협정영주권’의 적용범위를 戰前부터 계속해서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자와 1945년 8월16일 이후 협정발효 5년 이내에 태어난 2세, 3세의 한국국적 보유자로 한정하였다.

한국 국적의 재일조선인에게만 협정영주권을 부여한다는 한일간 합의는 재일조선인사회에 깊은 균열을 초래했다. 영주권과 국적 변경을 둘러싸고 이를 추진하는 한국정부 및 민단과 이를 저지하려는 조총련 사이에 치열한 공방이 일본 각지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협정영주권 신청자는 35만1755명(그 중 허가를 받은 수는 34만299명)에 달하였으나 북한국적 보유자가 신청기간에 5만6천명 가까이 감소했다. 조총련 결성 당시 전체 한국·북한 국적 보유자 중 75.1%를 차지하던 북한 국적보유자는 70년 12월에는 46%까지 떨어져 재일조선인사회의 분단은 한층 뚜렷해졌다. 가난한 재일조선인의 대량 귀국은 60년대의 고도경제성장에 따른 일본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재일조선인 사회에 구조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80년대 후반 이후에 급진전된 일본사회의 다민족화는 일본인의 ‘타자인식’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조선이나 아시아에 대한 인식에서도 90년대 이후 다양한 형태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이나 ‘사죄’가 등장한다. 일본 총리로서 식민지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해 ‘통절한 반성’을 언급한 무라야마담화(1995년)는 1996년 가와사키시가 정령시로서는 처음으로 채용 후 임용제한을 두면서도 국적조항의 원칙 철폐로 이어졌다. 뒤이어 고치, 가나가와, 오키나와, 오사카 등 2000년말까지 9개 부현, 8개 정령시에서 ‘국적조항의 원칙 철폐’가 실현되면서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본사회의 변화는 한국사회의 민주화와 함께 새로운 차원의 한일 두 사회의 상호교류를 가져왔다. 김대중 정부 출범 이후에는 일본의 대중문화의 단계적 해금,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 2004년 <겨울소나타>의 대히트 등 한일 대중문화의 폭넓은 상호교류가 실현됐다. 한류 열풍 속에서 일본인의 한국관도 크게 변화했고 재일조선인에 대한 시선도 크게 개선되었다.

한국에서는 2005년 8월 일본보다 앞서 정주외국인의 지방참정권이 인정되었고 2006년의 지방선거에서는 영주권을 취득한 지 만 3년이 지난 외국인 6726명이 선거권을 갖게 됐다.

90년대 이후 유학 등 한국에서 공부하는 재일조선인 청년들도 급증하면서 한일 양국에 걸쳐 직업이나 학술· 문화· 스포츠 활동을 영위하는 재일조선인도 적지 않다.

한편 2001년 한국 및 북한 국적의 특별영주자는 50만명 대를 최초로 밑돌았으며, 1995년 이후 귀화자수가 연간 1만명 안팎으로 추산되는 것으로 볼 때 21세기 중엽에는 국적 상 재일조선인은 거의 소멸할 것이라는 전망이 설득력을 갖고 있다.

이러한 ‘귀화 붕괴현상’의 배경에 대해서는 부모양계혈통주의에 근거한 국적법의 개정과 북한의 경제와 인권 몰락 등이 과거 주원인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일본의 우경화와 한일관계의 악화가 재일조선인으로서의 평온한 생활 및 존재 자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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