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설화 속 여인들②]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카산드라···자신 운명을 알면서도 거부못해
아폴론신 구애 거절했다 ‘불임의 예언’ 거듭한 트로이 왕녀
그리스신화에서 그리스 도시국가 연합군과 트로이왕국이 벌인 전쟁의 결과 수많은 행운과 불행이 교차됐지만, 트로이의 예언녀 카산드라도 ‘비운’의 주인공 가운데 하나이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의 왕녀였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 따르면 카산드라는 왕녀들 가운데서도 최고미인이었다. 그래서 “황금의 아프로디테와도 같다”고 불리기도 했다.
덕분에 그녀는 아폴로 신의 구애를 받았다. 카산드라는 아폴론신의 구애를 받아들였다. 아폴론 신은 예언능력을 준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녀에게 예언능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카산드라는 예언능력을 받자마자 태도를 바꿔 아폴론 신의 구애를 거절했다. 그러자 아폴론 신은 그녀의 예언을 아무도 믿지 않게 만들었다. 카산드라가 아무리 옳은 소리를 해도 아무도 믿지 않았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헬레네를 납치해 왔을 때였다. 카산드라는 그 사건이 트로이에 재난을 초래할 것임을 예견하고 파리스를 죽여야 한다고 외쳤다. 그러나 트로이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리스군이 트로이성 바깥에 목마를 만들어 가져다 놓았을 때도 카산드라는 그 위험성을 경고했다.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놓으면 트로이는 패망할 것이라고.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도 경청하지 않았다. 도리어 트로이인들은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갔다. 그 결과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군이 한밤중에 나와 트로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트로이는 끝내 패망하고 말았다.
카산드라는 트로이전쟁이 끝나자 그리스군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전리품으로 ‘배당’됐다. 그녀는 아가멤논의 노예이자 첩의 신세가 되어 미케네로 끌려갔다.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아이스킬로스의 <아가멤논>은 이런 설화에 의거해 창작된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도 카산드라는 클리타이메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의 음모로 아가멤논이 피살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또 클리타임메스트라는 장차 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아들 오레스테스의 손에 죽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물론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졌다.
“내 말을 안 믿어도 좋아요. 올 것은 오고야 마니까요.”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결국 아가멤논은 카산드라의 예언대로 피살당했다. 카산드라는 자신도 같은 운명에 빠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전리품으로 끌려 왔으니 피할 수도 없었다. 그러자 카산드라는 자신에게 닥친 죽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미 일리온의 도시가 그토록 비참한 종말을 고하는 것을 보았고, 또 그 도시를 함락한 자들도 신들의 심판에 의해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보았으니, 가서 나도 용감하게 죽음을 감수하겠어요.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카산드라는 죽음을 맞으러 아가멤논의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인간운명의 무상함을 노래하기도 했다.
아아, 가련하구나, 인간의 운명이여!
행복할 때는 하나의 그늘이 행복을 바꾸어놓고, 불행할 때는 젖은 해면이 한꺼번에 그림을 지워버리는구나! 아이스킬로스 <아가멤논>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작품 <트로이아 여인들>에서도 카산드라는 아가멤논에게 전리품으로 할당된 포로 신세이면서도 신들린 모습으로 횃불을 들고 나타난다. 그녀는 이 작품에서도 아가멤논과 자신이 죽음을 당할 것임을 예언한다, 그렇지만 어머니이자 트로이의 왕비였던 헤카베와 헤어지면서 비통해 하는 어머니를 위로한다.
?안녕히 계세요, 어머니! 울지마세요!
사랑하는 조국이여, 그리고 지하에 있는 오라비들과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머지않아 당신들은 나를 맞게 될 거예요.
나는 우리를 망쳐놓은 아트레우스 아들들의 집들을 부순 뒤 승리자로서 사자들에게 갈 거예요.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아 여인들>
?
뿐만 아니라 카산드라는 어머니 헤카베를 ‘배당’ 받은 오디세우스의 유랑에 대해서도 예견했다. 귀환 도중에 10년동안 온갖 모험을 겪은 끝에 홀로 귀환할 것이며, 그 후에도 수천가지 재앙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그 오딧세우스는 가엾게도 어떤 고난이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있소.
나와 프리기아인들의 불행은 그자에게는 언젠가 황금으로 보일 것이오.
그자는 이곳에서 보낸 10년에 덧붙여 10년을 더 채우고 나서야 혼자 귀향하게 될 것이오.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아 여인들>
카산드라는 그야말로 불행한 삶을 살다간 여인이다. 조국 트로이가 멸망하는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이미 알면서도 감수해야 했으니까. 짧은 한평생동안 볼 것, 봐서는 안될 것을 모두 본 것이다. 카산드라는 오늘날 식언을 일삼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지칭할 때 흔히 사용된다. 식언을 자주하는 사람은 나중에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중세의 시성 단테의 <신곡> 지옥편에는 예언자들의 무리가 벌받는 대목이 나온다. 이들은 생전에 너무 앞날을 내다보는 일만 했다는 이유로 얼굴이 뒤로 돌려져 있다. 때문에 앞으로 걸어가면서도 얼굴을 뒤쪽을 향하고 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참혹해서 단테는 울음을 참지 못한다. 그곳에서는 칼카스나 암피아라오스, 테이레시아스 같은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카산드라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는다. 카산드라도 당연히 이들 가운데 섞여서 벌을 받아야 하지만, 단테는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카산드라를 넣지 않았다. 그녀의 예언은 수용되지 않는 ‘불임의 예언’이었기 때문일까? 어쨌든 카산드라는 이런 ‘응징’을 모면했으니 ‘행운’이라고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