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3일] 팔-이 평화협정 이끈 노르웨이 외상

2012년 누워 버린 이태리 호화유람선

2012년 1월13일 밤 9시45분경 총중량 11만4137t의 대형 크루즈선 ‘코스타 콩코디아’호가 로마 북서쪽 100km 떨어진 이탈리아 서안 티래니안해(海) 이솔라 델 기글리오(Isola del Giglio)의 동쪽 해변에서 암초에 부딪혔다. 호화 유람선인 배가 암초에 부딪히는 순간 전기가 나갔고 선체가 우측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국제해양법상 배가 좌초됐을 경우 모든 승객들은 30분 이내에 배를 버리고 탈출, 구조돼야 하지만 이 사고에서는 무려 6시간이나 승객들이 구조되지 않은 채로 배에 남아 있었다.

당시 3229명의 승객과 1023명이 건조비가 총 5억7000만 달러에 이르며 길이 290m, 너비 35.5m의 이 초호화유람선에 타고 있었다.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30명이 죽고 사망으로 추정되는 실종자가 2명으로 집계됐다.

사고 원인은 선장 프란체스코 스케티노 선장이 무리하게 해안가로 접근하다가 암초에 부딪힌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졌다.

더욱이 스케티노 선장은 현재 사고 책임은 물론, 승객들이 안전히 대피하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탈출하는 등 승무원 규정 위반 등의 혐의로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4년 중동평화협정 일등공신 잠들다

1993년 9월 당시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의장은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땅과 평화를 교환한다”는 원칙에 합의했다. 이 자리를 만든 사람이 바로 외르겐 홀스트 노르웨이 외무장관이었다.

일명 ‘오슬로 협정’은 “1999년 5월까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측에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의 영토를 인도한다”는 내용의 협정이다. 이 협정을 계기로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페레스 외무장관, 아라파트 의장은 이듬해인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홀스트 장관 자신도 노벨상 후보로 추천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중재로 평화협정에 합의해 노벨상까지 받게 된 이들을 볼 수가 없었다. 1994년 1월13일 오슬로의 한 병원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기 때문이다. 그는 약 한달 전인 1993년 12월16일 스페인에서 귀국 도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치료를 받던 중 안타깝게 눈을 감았다. 56세였다.

홀스트 장관은 미국 컬럼비아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으며 국방장관을 두차례 역임한 뒤 1993년 4월 토르발트 스톨텐베르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에 취임했다.

오슬로 협정과 이에 따른 구체적 행동계획을 정한 와이리버협정이 실행되기까지는 숱한 곡절을 거쳤다. 1994년에는 팔레스타인인이 집단 학살된 ‘헤브론 사건’이 발생했고, 이어 라빈 총리의 암살과 강경파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의 등장으로 이어져 평화는 다시 암흑 속으로 묻혔다.?

1988 중국이 애도한 대만총통 장징궈(蔣經國) 사망

1988년 1월13일 장제스(蔣介石, 사진 오른쪽)의 아들이며 대만 총통으로 있던 장징궈(蔣經國, 사진 왼쪽)가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향년 78세. 1925년 10월 장징궈는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했으며?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1차 국공합작 기간이었다.

1927년 장제스가 ‘4·12 정변’을 일으켜 반공반소 입장을 드러내자 17세의 장징궈는 아버지인 장제스가 혁명을 배반했다는 성명서를 발표한다. 그는 성명서에서 자신의 친아버지를 적으로 불렀다.

“그(장제스)의 혁명 사업은 이미 끝났다. 그의 혁명에 있어서 그는 사형언도를 받은 거나 다름없다. 혁명을 배반한 이상 이제부터 그는 중국 노동자 계급의 적이다. 과거에 그는 나의 부친이며 혁명동지였다. 그러나 적의 진영으로 돌아선 이상 그는 나의 적일뿐이다.”

장징궈는 1936년 1월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 공산당 토벌에 전력을 다하고 있는 부친 장제스를 비난하는 공개서신을 발표했다. 그 어떤 정적도 그렇게 신랄하게 장제스를 비난하지는 못했다. “나는 그를 존경하는 마음이 조금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를 죽여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전후 세 차례의 반란에서 그 때마다 중국 인민의 이익을 팔아먹었으므로 그는 중국 인민의 적이기 때문이다.”

1937년 귀국한 장징궈는 아버지 장제스의 감독하에 ‘세뇌(洗腦)’를 했다. ‘총리전집’과 ‘15년 이전의 장제스’와 같은 장제스의 전기도 읽도록 했다. ‘세뇌’는 성공적이었다. 장제스가 바라던 대로, 한 때 공산당원이었으며 소련에서 12년을 생활했고 소련여자를 부인으로 둔 장징궈가 아버지 장제스의 정치노선을 따라 대만 관료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장제스 사망 이후 1978년 5월 20일 중화민국 제 6대 총통에 취임했으며 1988년 1월 13일 사망했다. 장징궈는 사망에 앞서 대만의 계엄 상태를 해제하였으며 중국의 친지를 방문하는 탐친(探親)을 허용했다. 또 대만성 출신 리덩후이(李登輝)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등 현실주의 노선을 채택했다.

중국은 장징궈가 사망한 다음날인 1월14일 그의 죽음을 애도하는 담화를 발표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관련 인사 및 중국 내 친지들이 모두 타이베이에 조전을 보냈다. 중국은 장징궈가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국가통일을 추구했으며, 양안관계의 긴장완화를 위해 일정한 노력과 행동을 했다고 평가했다.

1964년 힌두교도와 무슬림 충돌로 100여명 사망

1964년 1월13일 인도 캘커타에서 무슬림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폭력시위를 벌여 100여명이 죽는 사고가 발생했다. 힌두교와 달리 유일신 ‘알라’를 숭배하는 이슬람교의 무슬림들이 10세기 이후 인도 델리 지방을 차지하면서 전파되기 시작한 이슬람교는 인도문화에 많은 영향을 미쳐왔다. 1947년 파키스탄의 분리 독립에도 불구하고 인도에는 아직 약 12%가 넘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다. 무슬림이 절대다수인 카슈미르 지역의 귀속을 둘러싸고 인도는 파키스탄과 두 차례 전쟁을 치렀고, 무슬림 밀집지역인 인도북부 웃따르 쁘라데시주(州)에서는 힌두-무슬림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92년에도 힌두교도들은 ‘바브리 마스지드’ 무슬림 사원을 파괴한다. 파괴 직후 힌두교도와 무슬림간 유혈충돌로 약 1700명이 사망하고 5500명이 부상한다. 전쟁이었다. 힌두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분쟁은 종교적 교리와 관습의 차이에서 시작됐다. 힌두교도들의 눈에는 날로 교세를 넓혀가는 무슬림들이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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