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의 힘

[아시아엔=차기태 기자]중세의 시성 단테가 쓴 ‘신곡’에서 주인공 단테는 연옥을 순례할 때 몸을 굽힌 채 무거운 바위를 짊어지고 가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러자 단테는 함께 몸을 굽히고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단테는 지옥에서도 죄지은 영혼들이 겪는 고통을 보고는 여러차례 눈물 흘린다. 때로는 혼절해서 쓰러지기도 한다. 비록 연옥과 지옥의 영혼들이 생전에 큰 죄를 짓기는 했지만, 그들이 겪는 고통을 직접 보고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마음과 마음, 영혼과 영혼을 이어주는 ‘공감’의 몸짓이었다.

불행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보고 함께 마음 아파하는 경우 뿐만 아니다. 기쁜 일이 있을 때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 하늘 밑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희로애락을 나누는 것은 소중한 일이다. 한 나라와 공동체에서 기쁜 일을 함께 기뻐하고 슬픈 일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 바로 ‘공감’이다. 플라톤이 불멸의 명저 ‘국가’에서 말한 ‘한마음 한뜻의 나라’도 바로 이런 이치를 말한 것이다.

이를테면 2002년 월드컵 축구대회에서 우리나라가 기대 이상의 선전과 기대 이상의 성적을 냈을 때 우리 국민 모두 기뻐하고 즐겁게 자축했다. 지난 세월호 참사로 많은 인명, 특히 어린 학생들이 희생되었을 때 우리 국민 모두 마음아파 했다. 그런데 특별법에서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이런 ‘공감’과 ‘한마음 한뜻’이 무너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추석메시지에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에 대한 위로는 없었다. 국정을 주도하는 집권여당에서는 유가족과 대화다운 대화를 나눠보지도 않았다. 자신들의 주장이 옳다는 주장만 할 뿐 유족들을 설득하려는 노력은 거의 없다. 수사권과 기소권 문제를 둘러싼 논란 속에 어느쪽이 옳은지 함부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지만 함께 공감하는 최선의 방안을 찾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다면 해법은 나올 것이다. 그런 공감을 도출하려는 진지하고 성의있는 노력이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공감은 돌처럼 굳은 마음에 피를 돌게 하고, 얼음장 같은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다. 저승세계에 웅크리고 있던 복수의 여신들까지 눈물을 흘리고, 저승의 신 하데스가 오르페우스에게 아내 에우리디케를 돌려보내 준 것도 바로 공감의 힘이다. 아무리 슬픔과 미움이 크더라도 공감의 끈만 잃지 않는다면 대화마저 단절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는다. 희망의 실마리도 풀린다. 공감은 국경도 초월한다. 시간의 바다도 넘어선다. 그 옛날의 기쁨과 슬픔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의 대상이 되는 법이다.

아시아의 경우 이런 공감을 확대하는 노력이 더욱 절실히 요청된다. 인종과 종교, 정치적 이념과 노선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경제발전의 수준도 저마다 다르다. 국가간 갈등요인도 도처에 널려 있다. 그러니 미움과 반목이 확대재생산될 개연성이 그 어느 대륙보다 크다. 그런 가운데서도 공감을 찾으려는 노력만 꾸준히 이뤄진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활발한 무역과 경제협력·문화교류·스포츠행사 등등이 모두 그런 과정이다. 때마침 인천에서는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리고 있다. 이런 제전이 모든 분야에서 활발하게 전개돼 아시아인들 사이에 공감의 폭이 넓어지기를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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