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6일] 왕과 대통령 오간 캄보디아 시아누크

2010 프랑스 법원, 외규장각 도서 반환소송 기각

2010년 1월6일 한국의 시민단체 문화연대가 “1866년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침공한 병인양요 당시 섬 안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옛 도서를 반환하라”면서 프랑스 법원을 상대로 제기한 행정소송이 기각됐다.

프랑스 법원은 2009년 지난 12월24일 문화연대 변호인에게 보내온 판결문에서 “외규장각 도서는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된 국가 소유 재산으로, 과거 취득 상황이나 조건은 영향을 줄 수 없다”고 통고했다. 또 “도서를 약탈한 1866년 무렵에는 약탈 행위를 금지하는 국제 규범이 형성됐다고 보기 힘들며, 도서 반환 여부에 대한 현실적 가부 판단은 법원이 다룰 문제가 아니다”고 기각 근거를 제시했다.

프랑스가 1866년 병인양요 때 약탈해간 그 외규장각 도서 297권이 드디어 한국에 돌아왔다. 지난 2011년 6월 약탈당한 지 145년 만이다. 외규장각 도서는 지난 2011년 11월 22일 타계한 역사학자 박병선 박사가 1975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별관에서 그 존재를 처음 확인했다.

1976 시아누크, 캄보디아 대통령에 당선

캄보디아는 19세기 이래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 20세기 들어 군주제(君主制)가 유지됐으나 1941년 왕위에 오른 노르돔 시아누크가 1947년 왕국헌법을 공포, 입헌군주국을 발족시켰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된다. 1953년 완전 독립, 이듬해인 1954년 제네바협정에 따라 자주독립 중립국이 된다. 시아누크의 캄보디아왕국으로서 1970년까지 이어졌다.

1970년 론놀이 시아누크 외유 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1200년간이나 지속됐던 군주제를 무너뜨리고 스스로 대통령이 돼 캄보디아공화국을 세웠다. 시아누크는 망명지 베이징(北京)에 머무르면서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을 조직하였다. 베트남 전쟁 중 중국은 캄보디아민족통일전선을, 미국이 론놀 정권을 도와 내전으로 이어졌다. 1975년 4월 론놀 정권은 쓰러졌고, 이듬해 1월6일 급진좌파 무장단체 크메르 루주(Khmer Rouge, ‘붉은 크메르’라는 뜻)가 시아누크 왕을 국가원수(대통령)에 옹립한다. 하지만 같은 해 4월 캄보디아공산당서기장 폴포트가 민주캄보디아정부를 발족, 시아누크는 국가수반을 사임하고 가택연금 된다.

폴포트 정권은 농업 중심의 원시공산주의에 기반한 경제정책 실패, 반대자에 대한 대량 숙청, 베트남과의 국경분쟁 등 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당시 캄보디아인 약 200만 명이 학살이나 가혹한 노동으로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때문에 1978년 12월 베트남의 도움을 받은 캄보디아구국민족통일전선이 결성돼 베트남군과 함께 수도 프놈펜 등 여러 도시를 점령한다. 1979년 10월 헹삼린 의장을 수반으로 하는 캄보디아인민공화국(헹삼린정권)이 발족했다. 베트남군은 1982년 7월부터 1989년 9월까지 7년2개월에 걸쳐 완전 철수했다.

1991년 7월 파리평화협정에 조인, 베트남군 침공 이래 13년간 끌어온 내전이 부분적으로 종결됐다. 1993년 9월 신헌법이 공포되고 시아누크 국왕이 즉위, 입헌군주제가 부활했다. 1997년 킬링 필드(캄보디아 학살)의 주인공 폴포트가 체포돼 감금됐고, 이듬해인 1998년 감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한편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2012년 11월15일(현지시간) 중국 베이징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중국 베이징에서?질병 치료차 수년째 체류 중이던 시아누크 전 국왕은 15일 향년 89세?자연사한 것이다. 시아누크는 1941~1955년, 1993~2004년 등 두 차례에 걸쳐 국왕을 지냈다.

1953년 버마 랭군에서?제 1회 아시아사회주의자대회 개최

1953년 1월6일부터 12일까지 버마 수도 랭군에서 제 1회 아시아사회주의자대회(Asian Socialist Conference, ASC)가 열렸다.?이 대회는 1960년까지 존립했던 아시아 각국 사회주의 정당들의 연합체로서 미얀마 랭군에 본부를 뒀다. 의장도 버마의 마 쉐(Ba Swe)가 맡았다.

아시아사회주의자대회 공식 마크.

첫 대회에는 각국에서 자신들의 정파를 대표해 총 177명이 참석했다. 인도에서는 무려 77명이 참가했고 일본에서는 좌익 사회주의당과 우익사회주의당에서 각각 30명이 참석했다. 인도네시아에서도 26명, 미얀마에서는 15명, 이집트에서도 1명이 참가했다.

이밖에 이스라엘과 레바논, 말레이시아, 파키스탄 등 서아시아와 남아시아 국가의 사회주의자들, 프랑스 사회당과 영국노동당, 스웨덴 사회민주당에서도 대표자들이 참석했다.

이 기간동안 2차례의 ASC가 열렸는데 첫 랭군 대회 뒤 3년 뒤인 1956년 인도 봄베이에서 2번째 회의가 열렸다. 당시 ASC 회원은 약 50만 명 수준이었다.

1951년 국제사회주의자연맹 창설 당시부터 이 단체가 너무 유럽 중심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아시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ASC가 결성됐다.

반제국주의인민의회(뉴질랜드 32대 수상의 2번째 부인인 마가렛 포프(Margaret Pope)가 제안) 결성 안건을 비롯해 국제사회주의청년연합 결성, 유고슬라비아 공상주의동맹, 네팔의 최초 민선 수상인 코이랄라(Bishweshwar Prasad Koirala)가 제안한 네팔의회 문제, 아프리카 자유운동대표단 등이 대회 주요 안건이었다.

대회 모든 일정은 영어로 진행돼 인도 대표에겐 유리했지만 일본과 인도네시아, 유고슬라비아 대표들에게는 불리했다.

한국 경향신문은 같은 해 1월25일 사설에서 이날 대회에 대해 자세히 논평을 했다. 경향신문은 “분화직전의 위기에 봉착한 국제정세를 다개하고자 세계평화를 성취하는 것은 세계사회주의운동을 추진하는데 달려 있으며, 이를 위해 아시아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일치단결해야 한다”는 애들리 전 수상(영국노동당을 대표해 참석)의 연설을 소개했다.

또 인도대표가 “전쟁 양대세력에 휩쓸리지 말고 초연하자”고 한 연설, 인도네시아 대표가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에 관련한 아시아적 특수성에 대한 연설, 코민포름 노선과 다른 유고공산당의 노선 등을 소개했다. 대부분 ‘중립노선’에 관한 것이었다.

사설은 “동서냉전속에서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수호를 위해 아시아에서 제3세력을 형성, 동서 양극단을 배격하자는 움직임”이라고 대회 성격을 분석했다. 또 당시 한국전쟁 종전 안에 대한 인도의 안이 중국에 의해 거부당했음을 감안, 반공산주의 진영에 명백히 서야한다는 취지로 결론을 내렸다.

1883? 칼릴 지브란 출생

“사랑이 다가오면 온몸으로 포옹하라 / 비록 사랑의 날개 속에 숨은 비수가 그대를 피 흘리게 할지라도… 사랑하는 이들이여 / 그대들의 사랑에 항상 바람이 불 수 있는 거리를 두라 / 성전의 기둥들이 거리가 있듯이… /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에 거리가 있듯이….”

시인이자 화가, 철학자, 구도자로 ‘아름다운 영혼의 순례자’라는 최고의 수식어가 붙는 칼릴 지브란은 가슴 반쪽에 예수를, 다른 반쪽에는 마호메트를 품었던 20세기의 성자로 불렸다.

1883년 레바논에서 태어나 12세 때 미국 보스턴으로 옮겨온 지브란은 두 개의 세계에서 살았다.

아랍과 서구(西歐), 레바논의 거룩한 삼나무 숲과 아메리카의 마천루 숲, 고대 페니키아 예언자의 세계와 냉혈로 가득 찬 20세기의 문명세계.

그는 거대한 괴물과도 같은 뉴욕에 살면서, ‘증오는 넘치고 마음의 여유는 없는’ 세상에 영혼의 등불을 밝히고자 했다.

그가 풍기는 이슬람 신비주의(수피즘)는 독자들을 고대로 이끄는듯 하지만 초기 시작(詩作)들은 종족 추방과 레지스탕스로 점철돼온 조국 레바논의 가파른 역사를 뜨겁게 짊어지고 있다.

그는 돈과 권력에 미친 교회와 정부를 격렬히 비판하였고 불의(不義)와 극단주의, 제도화된 폭력을 배격했다.

아랍어로 씌어진 ‘반항하는 영혼’은 금서로 지정돼 베이루트 광장에서 불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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