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의 추억’과 ‘틈바구니 외교’가 왕권 부른다

김정은 후계구도가 알려진 뒤 남한 사람들은 좌우 이념성향을 막론하고 ‘3대 세습’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다. 지구촌 사람들 대부분도 북한체제를 ‘시대착오적 왕권세습’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색다른 시각도 있다. 북한의 절대 권력이 힘세고 못된 ‘폭군(김일성 일가)’의 의도대로만 진행돼 온 게 아니며, 역사·문화적 전통의 맥락에서 ‘왕권’에 대한 불가피한 합의가 존재해왔다는 주장이 그런 색다른 시각이다.

김일성 일가가 원한 세습 아니다?

북한의 최고 권력자였던 고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개인적으로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는 ‘세습’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지만, 지난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지속가능한 체제 안정’ 대안을 찾지 못해 ‘왕권’에 견줄 수 있는 권력세습을 본격화 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9년 1월 <김정은 후계자 내정> 기사를 세계 최초로 보도해 2010년 한국기자대상을 받은 연합뉴스 장용훈·최선영 기자는 <한겨레21>의 송년호에 기고한 <20대 ‘수습’대장, 김정은의 모든 것>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김 위원장은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후계 세습 문제에, 공식적으로는 거리를 둬왔다”고 밝혔다.

또 “그는 평소 ‘세습을 하면 국제사회의 웃음거리가 된다’며 주변 고위간부들의 후계 내정 건의를 외면해 왔다”고 밝혔다. 이는 김 위원장이 단기적으로 레임덕을 우려했고, 중장기적으로는 스스로가 ‘세습된 권력자’라는 점을 인정해 권력의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음을 우려한 것으로 풀이됐다.

두 기자는 기사에서 “지금도 북한 주민 대부분은 김 위원장의 아들이 김정은 한 명 뿐이라고 알고 있다고 한다”면서 “2009년 김 위원장이 후계자 낙점 교시를 노동당 간부들에게 내릴 때에도 일체의 신상에 대한 언급 없이 ‘장군님의 아들’이라고만 했다”고 전했다.

중국모델 ‘No!’ 미국모델 ‘Never!’

올브라이트 전 미 국무장관의 자서전 등에 따르면,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 세습에 부정적이었지만, 자신이 구상했던 ‘북한 체제의 지속가능한 발전 모델’은 미국식 민주주의나 중국식 공산당 집단지도체제와는 전혀 다른 뭔가가 있었다.

김 위원장이 체제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 ‘통치하는 왕권’을 희구해 왔음이 드러났고, 이에 가장 가까운 역할모델로 ‘태국’이 고려돼 왔음이 부각된 것이다.

지구촌 여러 나라에서 상징적이든, 실질적이든 아직도 왕의 권위를 인정하고 계승하는 정치행태들이 유지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북한의 세습 권력을 다시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현대국가에서 어떻게 ‘통치하는 왕권’이 가능할까”라는 물음과 “김정은을 중심으로 북한이 태국처럼 ‘통치하는 왕권’을 연착륙시킬 것인가”의 물음에 동시에 답을 준다.

특히 북한이 태국 모델을 보면서 추구하는 ‘왕권’은 일본이나 영국, 스웨덴 등과 같은 ‘상징권력’이 아닌 ‘살아 있는 통치권력’을 의미한다. 동시에 태국의 외교사(外交史)가 말해주듯, 부정적 의미의 ‘반(反)외세 절대독립왕정’이 아닌 “외세와 유연한 공존 및 타협”을 보장하는 ‘왕정’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신이 부여한 권력, 인자한 아버지 태국 ‘왕’

부산외국어대학교 나희량 교수(국제무역학)는 이 학교 동남아지역원(원장 박장식 교수)이 발행하는 학술지 <수완나부미(Suvannabhumi, 태국 방콕의 국제공항 소재지로 한국말로 ‘황금의 땅’>에 2010년 12월에 기고한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헌법에 보이는 전통적 문화 요소>라는 제목의 연구논문에서 “태국의 왕권은 이 지역의 전통적 문화요소와는 다른 공존과 타협의 특징을 보인다”고 주장했다.

베트남과 캄보디아는 당초 외세에 대한 배타적 의식과 독립을 지켜내기 위한 열정과 노력이 돋보이는데, 유독 태국은 ‘불교적 세계관’에 기초한 왕권 인정과? ‘외세에 대한 유연한 공존 및 타협’이 두드러져 왔다. 주변 지역을 통틀어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국주의 침탈이나 영토분쟁 등으로부터도 가장 자유로운 나라가 태국이다.

앙코르제국의 자야바르만 7세는 관세음보살로 대체된 신왕(Deva Raja)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사진은 바이욘 사원의 4면 입체 관세음보살 석탑. 자야바르만 7세는 관세음보살의 얼굴 대신 자신의 얼굴을 새겨넣음으로써 자신을 신격화 시켰다.

나희양 교수는 “3개 나라에서 ‘왕권’은 크메르의 앙코르 제국에서 풍미하던 힌두문화의 데바라자(Deva-Raja) 의식에서 나타나는 신왕(神王, god-king)개념에서 비롯됐다”고 설명했다.

태국의 경우 이런 전통적 왕권개념이 수코타이 왕조 3대 왕인 랑캄행 왕(1279~1298)으로부터 비롯된 ‘인자한 아버지(Phoekhun)’로 이어지고, 지금처럼 왕에게 불법(佛法)을 준수하고 보호하는 탐마라차(‘보살 행(行)’의 길로서 불교의 이상적인 정치지도자) 역할이 주어지게 된다.

태국은 1932년 무혈혁명으로 실질 왕권이 상실되고 입헌군주국으로 정치체제가 바뀐다. 다만 태국 국민들이 보여주는 왕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은 여전히 각별하고 이런 국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왕의 정치적 위상은 유지돼 왔다. 무엇보다 정치적 이슈의 최종 결정시 왕의 선택이 국민적 합의결정으로 인정되는 독특한 현대판 ‘왕정’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대국 틈바구니, 왕권에서 생존법 찾은 태국

나 교수는 “태국은 강대국들 사이에서 살아남고자 강대국의 부침에 편승해 ‘줄 타기식 정치·외교 노선을 취해왔다”면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와 달리 태국은 탄력적 정치·외교적 노력으로 독립을 유지해 나갈 수 있었던 상반된 역사적 경험이 돋보인다”고 밝혔다.

태국 헌법 전문에는 태국인들의 왕의 인격과 권위에 대한 존중의식이 직접 언급되고 있으며, 헌법 개정의 정당성과 정통성이 왕의 추인이라는 과정을 통해 확증되는 절차를 두고 있다.

나교수는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헌법에 보이는 전통적 문화 요소의 흐름은 결코 한 시대의 정권이나 이념에 의해 쉽게 단절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경제의 일부 효율성 문제를 제기하는 태국의 지식 엘리트들도 자신들의 ‘왕정’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부인하지 않는다. 태국의 저명한 정치학자이자 저널리스트인 클링삭 차레온웡삭(Kriengsak Chareonwongsak, 사진) 박사는 지난해 2월14일 방한, 기자와 만나 “‘통치하는 왕’에 대해 다른 나라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 현 태국 국왕은 국민 안녕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또 “왕실은 한계계층(marginal people)을 포함한 빈곤층을 위해 최소 3000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왕의 역할과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미 하버드 대학과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북한체제 아직 정답이 없다

2012년 초 현재 태국은 ‘노란셔츠’와 ‘붉은 셔츠’로 대표되는 정파대립이 지속되고 있다. 국왕과 왕당파의 절대적 복종. 서민층의 지지를 받는 재벌 출신 전직 총리(탁신)가 이끄는 야권과 부자들의 이익, 원로원격의 권력과두그룹의 지지를 받고 있는 현 집권세력, 군부 등 태국의 정치적 지배구조는 여전히 복잡하다.

탁신 전 총리의 친 여동생인 잉락 친나왓이 지난해 7월 태국 첫 여성총리로 뽑혔고, 탁신은 집권 여당인 푸어타이당의 실질적 지도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생전에 김정일 위원장이 엄청난 부패로 추방당한 탁신 전 총리까지 북한의 미래 청사진에 포함시켰을 리는 없다. 또 왕실이 여느 자본가와 비슷한 방식으로 막대한 토지와 금권을 쥐고 행사하는 태국이 정확히 북의 미래와 일치하지도 않아 보인다.

다만, 김 위원장이 국민들이 합의에 이르는 정치적 틀을 ‘통치하는 국왕’이 있는 태국으로 삼았다는 점은 적잖은 의미를 갖는다.

익명을 부탁한 한국의 한 중견 언론인은 “국가 정치체제에 관한 한, 남한 사람 대부분은?‘미국식 민주공화주의 국가체제’ 이외에는 기준이 될만한 게 없었다”면서 “북한이 입헌군주제 나라들이나 태국 같은 독특한 왕정국가도 벤치마크 하고 있다는 점은 현 시기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말했다.

이상현 기자 coup4u@theasia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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