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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여류:시가 있는 풍경] ‘빈숲의 노래2-깊은 가을’
그대는 떠나고 나는 머문다. 한 대의 향을 피우고 그대를 생각한다. 창밖으로 가을이 저물고 있다. 세상을 향해 길 위에 나선 그대 오늘 저녁 머물 곳은 어디인가. 나의 몸은 집에 매여 있고 그대의 몸은 길 위에 있다. 존재를 위해 지은 집에서 내 존재는 소유 당하고 붙잡는 길 위에서 그대는 새롭게 길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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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와 음악]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ㅡ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신경림(1936~ ) 시집, ‘農舞’, 창비,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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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노경老境’ 구상
여기는 결코 버려진 땅이 아니다. 영원의 동산에도 꽃 피울 신령한 새싹을 가꾸는 새 밭이다. 젊어서는 보다 육신을 부려왔지만 이제는 보다 정신의 힘을 써야 하고 아울러 잠자던 영혼을 일깨워 형이상形而上의 것에 눈을 떠야 한다. 무엇보다도 고독의 망령亡靈에 사로잡히거나 근심과 걱정을 능사能事로 알지 말자. 고독과 불안은 새로운 차원의 탄생을 재촉하는 은혜이어니 육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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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무화과나무 아래’ 이흔복
무화과나무 아래 침묵과 휴식 가운데 진리를 갈망하던 나타나엘을 본다 최후의 심판에서 미켈란젤로의 가죽을 들고 있는 나타나엘을 본다 나타나엘이여, 그대의 운명을 남이 안다는 건 끔찍한 일이거늘 그대의 운명을 그대가 안다는 것은 더욱 끔찍한 일이다 그대는 그대를 위해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 이흔복((1963~ ) 시집, ‘내 생에 아름다운 봄날’,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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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가을의 속도’ 최하림
줄달음쳐 오는 가을의 속도에 맞추어 나는 조금 더 엑셀러레이터를 밟습니다 차가 빠르게 머리를 들고 나아갑니다 산굽이를 돌고 완만하게 경사진 들을 지나자 옛날 지명 같은 부추 마을이 나오고 허리 굽은 노인들이 앞서거니 뒷서거니 가는 모습이 보이고 가랑잎도 비명을 지르며 떨어져내립니다 물이고 가랑잎이고 가을에는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산 속의 짐승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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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가을 편지’ 이흔복
고죽을 향한 홍랑의 일편심 사랑이 붉어서 가을은 달빛도 한층 높아만 갑니다. 당신은 물로 만든 몸 당신은 벌써 오랫동안 진리보다는 애정에 살고 있습니다. 나는 누군가의 꿈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발 헛디딘 나 사랑에 아팠습니다. 사랑을 사랑했던 자신에게만 들키고 싶은 낯선 시간 저 아래 저 아래로 흘러흘러 나 스스로 어디에서 몽리청춘夢裏靑春을 닫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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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거미’ 김수영
내가 으스러지게 설움에 몸을 태우는 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으스러진 설움의 풍경마저 싫어진다. 나는 너무나 자주 설움과 입을 맞추었기 때문에 가을바람에 늙어가는 거미처럼 몸이 까맣게 타버렸다. – 金洙暎(1921~1968) 詩選集, ‘사랑의 변주곡’, 창비,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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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시와 음악] ‘늦가을 감나무’ 함민복
저거 좀 봐 밝은 열매들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나무를 들고 있는 것 같네 사뿐, 들고 있는 것 같어 대롱대롱 들고 있는 것 같지 그러라고 잎도 졌나봐 어! 구불구불한 가지들이 슬금슬금 펴지네 -함민복(1962~)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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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마른 국화 몇 잎’ 황동규
다 가버리고, 남았구나 손바닥에 오른 마른 국화 몇 잎. 짧은 가을이 갔다. 떨어진 나뭇잎들 땅에 몸 문지르다 가고 흰머리 날리며 언덕까지 따라오던 억새들도 갔다. 그대도 가고 그대 있던 자리에 곧 지워질 가벼운 나비 날갯짓처럼 마른 국화꽃 내음이 남았다. 우리 체온이 어디론가 가지 못하고 끝물 안개처럼 떠도는 골목길에 또 잘못 들어섰다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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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음악] ‘늦가을 문답’ 임영조
그 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아하! 무릎 칠 때는 이미 늦가을 억새꽃이 절레절레 제 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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