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군사평론가; 육사 28기, 국방부 군비통제관, 국방부 정책기획관 역임
  • [김국헌의 직필] 육사 기강, 문제는 교관이다

    육사가 흔들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 크다. 문제는 이런 일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항상 있어 왔다. 1950년대 초 육사에 들어온 생도가운데는 이미 결혼을 하고 아이를 둔 생도도 있었다. 요사이 3금의 제약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개반구저기(皆反求諸己)’의 자세로 자신을 돌이켜보고 ‘과즉물탄개(過卽勿憚改)’의 의지로 고쳐나가면 되는 것이다. 3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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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박정희-백선엽-박근혜

    전쟁기념관에는 국군 장교와 인민군 병사가 부둥켜 안고 있는 ‘형제상’이 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국군 최고의 전략가’ 이병형 장군을 전쟁기념사업회장으로 임명해 전쟁기념관을 완성시켰다. 노태우 대령이 8사단에서 연대장을 하던 때 이병형 장군은 직속상관인 5군단장이었다. 노태우는 하나회 핵심으로 군의 질서를 어지럽힌 사람 중의 하나이지만 군에서 가장 존경을 받는 선배가 어느 분인가에 대한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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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다부동 전투(1950.8.4.~30)

    다부동 방어선은 좌측방이 낙동강에 연하여 방호되며, 유학산~가산 일대의 고지군들이 북쪽을 향하여 횡격실(橫隔室)을 이루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만약 이 방어진지가 돌파되면 아군은 10km 남방의 도덕산 부근까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되는, 대구방어에 있어 핵심적인 요충지(要衝地)였다. 북한군이 대구를 점령하려고 계획했던 195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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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백선엽 전 교통부장관’에서 엿보는 역사인식

    이명박 대통령이 국민원로회의에서 세종시 문제에 대한?자문을 구하는 자리를 보도하는 동아일보 기사에? 백선엽 장군을? ‘전 교통부장관’ 이라고 소개한 것을 보았다.? 한국군 최초의 육군대장으로서 두 번의 육군참모총장을 지냈고, 예편 후에는 주불대사? 등을 지내다가, 박정희 정부에서는 교통부장관도? 지냈으니 그 소개가 틀린 것도 아니다. 미군들과 협조하며, 간혹 팽팽한 협상을 하다보면? 외교관이나 비즈니스맨들과는 달리, 군인들끼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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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원수’ 반열에 오른 장군···김홍일과 백선엽

    원수(元帥)가 어떤 존재인 줄 아는가? 러일전쟁에서 원수가 된 장군들을 찾아다니는 생도가 있었는데 그 별명이 삼원수(三元帥)라 불렸다. 사관생도로서 하늘같은 원수들을 찾아본다는 것이 너무도 엄청나게 보였던 것이기에 붙인 이름이다. 이것이 원수다. 즉 원수란 군인으로서 입신의 경지에 든 군인을 일컫는다. 영국의 몽고메리, 독일의 롬멜, 미국의 맥아더, 소련의 주코프, 일본의 도오고 헤이하치로 등 최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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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반공포로 석방

    1953년 6월 18일 자정 엄청난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2만6930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한 것이다. 면도를 하고 있던 처칠이 놀라 턱을 칼로 베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세계는 진동하였다. 이승만의 결단은 세계의 정치를 읽고 있던 탁월한 안목에 기반하고 있었다. 그는 조지워싱턴대학과 하버드대학에서 배우고 프린스톤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당시 한미 양국을 통틀어 최고의 인텔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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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일본군서도 배울 게 있었다···김석원과 채병덕

    김석원 장군은 구한말 무관학교로 입교하였다가 한일병탄 이후 일본육사로 편입되어 27기로 임관, 이후 일본군 대좌까지 복무하였다. 해방 후 일본군 출신은 근신하여야 된다는 생각에서 군에 바로 들어가지 않고 있다가 육사 8기 특별반으로 임관, 1사단장으로 1949년 1월 개성지구를 담당하였다. 1949년 5월부터 38선 일대에서 북한의 잦은 국지도발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북한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내무성 예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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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유재흥 2군단의 ‘영천회전’

    북한군의 8월 공세는 8월 20일을 전후하여 끝났다. 북한군은 9월 2일 9월 공세를 개시하였다. 북한군은 이미 공세한계점에 이르렀음에도 부산점령을 위한 마지막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마치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와 모스크바 공략에 매달린 것과 같은 김일성의 집념이었다. 북한군이 9월 공세를 위하여 남한에서 보충한 병력의 대부분은 남한 점령지역에서 의용군이라는 명분으로 강제징집한 신병들로서 북한군 병력의 3분의 1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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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⑮백선엽과 ‘다부동 전투’

    다부동 방어선은 좌측방이 낙동강에 연하여 방호되며, 유학산~가산 일대의 고지군들이 북쪽을 향하여 횡격실(橫隔室)을 이루고 있어 방어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만약 이 방어진지가 돌파되면 아군은 10km 남방의 도덕산 부근까지 철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임시수도 대구가 적 포화의 사정거리에 들어가게 되는, 대구방어에 있어 핵심적인 요충지였다. 북한군이 대구를 점령하려고 계획했던 8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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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직필] 3금(三禁)은 생도문화의 일부

    3금은 생도문화의 일부이다. 3군사관학교의 3금조항이 생도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것이니 이를 시정하기 바란다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권고가 있었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3금제도는 생도교육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인권위의 판단과 상관없이 계속 유지되어야 할 제도라는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 우리는 국가인권위원회의 국민생활의 다방면에 걸친 광범위한 관심과 요구에 대해 일면 경의를 표한다. 그러나 이 문제는 차원과 범주의 적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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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⑭”제2의 덩케르크같은 철수는 없다”

    북한군 6사단은 천안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군산에서 금강 하구를 도하하였다. 그 후 미 24사단이 대전을 철수한 20일에는 전주를 점령하고 남원-광주-순천 축선으로 매일 30km 속도로 남진을 계속, 목포, 보성, 여수를 차례로 점령하고 동진하여 하동-진주를 점령, 7월 말에는 부산에서 불과 50km 거리인 마산 지척에 진출하여 서쪽으로부터 부산을 우회 공격함으로써 낙동강 방어선을 펴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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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⑬새로운 ‘강적’ 등장···북한군의 지휘력

    1950년 7월 5일 새벽 미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부대는 오산 북쪽의 죽미령에서 유경수의 105전차사단의 107전차연대와 조우하였다. “노란 색깔의 동양인 부대는 천하무적의 미군이 참전하였다는 것만 보고도 도망가고 말 것”이라는 미군의 호언장담이 무색하게 스미스부대는 T-34전차에 무참하게 유린당했다. 180여명이 전사 또는 실종되었으며, 105mm 곡사포를 위시한 모든 공용화기를 잃었다. 곡사포 1개 포대로 지원된 소총 2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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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⑫ 미군개입과 김일성의 ‘외통수’

    서울이 함락된 직후 6월 29일 박헌영은 남한의 노동당원 및 인민들에게 인민군의 진격에 호응하여 궐기하라는 방송연설을 하였는데, 여기에서 박헌영은 전황의 전개에 대해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었다. “수도해방은 실로 이번 전쟁의 승패를 사실적으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벌써 미제국주의자들은 남반부로부터 총퇴각을 시작하였으며 그의 침략도구인 유엔 조선위원단도 동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승만 역도들은 서울을 버리고 도망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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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⑪ 김일성이 전쟁 전면에 나서다

    북한군이 전체 전선에서 순조로운 진격을 해나가고 있는 가운데, 6월 26일 최고인민회의는 정령 ‘통일적 령도기구로서의 군사위원회를 조직’을 채택하고 위원장에 김일성을 임명하였다. 군사위원회는 그 산하에 공화국 내각의 각 성, 국들을 비롯하여 국가의 중앙기관들과 각 도와 시 지방군정부들을 소속시켰다. 각 지방군정부는 도와 시의 인민위원장을 위원장으로 하고 인민군 대표 및 내무기관 대표들로 구성되었다. 군사위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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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국헌의 다시쓰는 6·25] ⑩ 미군참전과 ‘육해공총사령관’ 정일권

    북한의 기습남침은 미국에게 마치 진주만기습을 방불케 하는 충격이었다. 미주리의 별장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던 트루만 대통령은 24일 밤 9시(미국 시간) 애치슨 국무장관의 보고를 받고 즉각 사태를 소련의 대미 전면도발로 인식하였다. 워싱턴으로 돌아온 트루만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한국군 지원을 위한 장비 및 군수물자의 지원과 주한 미국인 철수를 지원하기 위해 해공군의 사용을 승인하고 7함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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