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산업
[인산 김일훈 59] 함양의 독존자, 주변에선 ‘도인’이라 불러
아내 장영옥과 장남(윤우), 차남(윤세)을 데리고 함양에 도착한 인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천하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도인’이라고 알려지는 바람에 그곳 유지들과 어울려 지내게 되었다. 딴에는 그들 모두 신선사상이라든가 도의 세계에 대한 짙은 동경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었기에, 그들이 먼저 ‘도인’인 인산과 교분을 나누며 지내고 싶어했던 것이다. 서부 경남에서 ‘정약국’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더 읽기 » -
사회
[인산 김일훈 58] 천연기념물 154호 ‘상림’ 품은 함양, 성자를 기다리다
경상남도 함양읍에는 ‘상림(上林)’이라는 인공 숲이 있다.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고 불렀으나 그 숲의 중간 부분이 홍수로 무너져 상림과 하림(下林)으로 나뉜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하림은 훼손되어 흔적만 겨우 남아 있고, 상림만이 예전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그 상림은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으로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역사적 가치와 함께 우리 선조들이 홍수의 피해로부터 농경지와…
더 읽기 » -
사회
[인산 김일훈 57] 공주 마곡사 산판의 지게꾼···불의한 경찰을 혼내다
참나무골에는 기와를 구워내는 기와 가마가 있었고, 인산과 그의 아내는 갓 태어난 장남 윤우와 함께 그곳 기와막 곁방에서 살았다. 날이 밝으면 인근 산판에 나가 하루 종일 소나무나 참나무 장작을 패서 지게로 져 나르는 일로 품삯을 받아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전선(戰線)은 반도의 허리께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일반 백성들은…
더 읽기 » -
사회
[인산 김일훈 56] 국민의료법 제정과 한의사자격증에 숨은 이야기들
1951년 9월 25일, 정부는 국민의료법을 제정ㆍ공포하였다. 비록 전시(戰時)이긴 하였지만 정부 수립 이후 각 방면에서의 국가 체제 정비를 해나간다는 정책의 일환이었다. 그 법에 따라 그 이듬해 1월 15일에 한의사국가시험령이 반포되었고, 같은 달 30일에 국가시험 응시자격 검정시험 규정이 마련되었다. 전통 의학에 입각하여 환자들을 치료해 오던 한의사들이 비로소 법적 근거를 갖고 개업을 할…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55] 부친 장례를 마치고···’짧은 생애 통해 내가 이룬 결과, 다 볼 순 없겠지만’
인산 역시 아버지와 아내를 계룡산 밑 백암동에 두고 부산에 내려와 있던 처지였으므로 9ㆍ28 서울 수복 직후부터는 틈을 내어 가족에게 다녀오고는 했다. 그 사이에 아버지 경삼 옹과 아내는 인산이 일러주었던 대로 공주의 마곡사(麻谷寺) 부근(충남 공주군 사곡면 운암리)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다. 마곡사에서 실개천을 하나 건너 ‘참나무골(일명 참나무쟁이)’이라고 부르는 동네의 기와막 방…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54] 부산 동광동 세춘한의원 시절…”거기 가면 못 고칠 병이 없다네”
마침내 김일성의 명령을 받은 공산군들이 38선을 넘어 남침을 개시하여 한반도 전역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한국전쟁의 시종 진행 과정이나 그로 인한 인적 물적 피해 사실은 익히 알려진 대로다. 인산은 전쟁 발발에 앞서 부산에 내려가 있었으나, 그 전쟁을 미리 예견하고서도 이 민족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었던 현실 때문에 내내 마음이 아팠다.…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53] 민족 최대 비극의 날을 앞두고
민족 비극의 시작을 잉태한 경인년의 첫 태양이 여느 해와 다름없이 밝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충남 논산군 은진면으로 내려와 살던 최영호 선생이 백암동에 걸음을 하였다. 인산은 환자를 보다 말고 반갑게 최영호 선생을 맞아들였다. “어쩐 일로 선생님께서 이 외진 곳까지 친히 왕림을 하셨습니까? 다시 뵈오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만…….” “인산, 어찌 지내셨소?…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52] 종교집단으로부터 교주 제안을 받지만…
‘인술(仁術)이 무엇이던가? 의자(醫者)로서 재물을 밝힌다면 어찌 인술을 베푼다고 자처하는 마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으리오?’ 하루는 인산이 볼일을 보러 외출했다가 신도안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길을 지나갈 때였다. 도포를 입고 갓을 쓴 노인 한 분이 아무도 없는 길가에 혼자 서 있다가 인산을 보고서는 단걸음에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저는 아무개…
더 읽기 » -
사회
[인산 김일훈 51] “환자 건강 되찾아 주는 게 나의 본분”
점차 밀려오는 환자들의 수효가 늘어나 진료 이외의 일에는 손을 줄 수 없는 실정이 되어갔다. 하지만 인산을 찾아오는 환자나 그 가족들이 모두 공손한 태도로 인산을 대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종종 그 다급한 마음에서 무리한 요구나 의심하는 마음을 앞세워 무례한 언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꼭 고치겠다는 보장을 해주십시오. 만일 내 가족의…
더 읽기 » -
사회
[인산 김일훈 50] “계룡산 백암동 서문달에 명의가 산다”
보건당국 요로(要路)의 실무자들은 대개 서양의학 위주의 교육을 받고 그것만이 참다운 의학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설령 그들에게 인산이 신약 원리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해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인산은 계룡산 서쪽 발치에 자리잡은 초막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나뭇짐을 져다 팔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약의 합성실험을 계속하였다. 한문을 위주로 배우러 오는 아이들에게…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49] 극심한 난치병들이 발호할 것을 염두에 두고…
그로부터 3년의 세월이 지나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인산의 신상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다. 그 사이에 삼팔선을 넘어가 아버지 경삼 옹을 모셔왔고, 약혼녀 장영옥을 데려와 가정을 꾸린 것이 변화라면 변화였다. 인산은 그곳 계룡산 밑 불암리에 살며 농사를 짓거나 나무를 해 장에 내다 팔며 생계를 이었다. 그러는 틈틈이 인근 아동들에게 고전(古典)을 가르치는 일도…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48] 해방정국 좌우익 싸움 통에 계룡산으로
해방 직후 서울로 내려와 송운 방주혁 선생 댁에 머물던 인산은 좌우익의 진흙탕 싸움을 목도하고는 ‘이 나라가 아직 치러야 할 고난의 세월이 남은 탓이다’라고 생각하여 충남 계룡산을 찾아 들어갔다. 당시에 접한 거물급 인사들과 나누던 ‘새 조국 건설의 청사진’에 대한 온갖 계획도 하나의 이상(理想)에 불과하다는 체념이 있은 뒤였다. 계룡산 천황봉(845m) 정상에 올라선…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47] 죽음 앞둔 뇌염환자 고치니 되레 조롱이 쏟아져
인산 죽염으로 잘 알려진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은 각종 암치료 신약을 발명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독창적인 한방 암치료를 설파하며 난치병 환자를 평생 치료했다. 선생은 만성 질환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이 없는 세상, 육신이 파괴되는 질병의 고통이 사라지는 세상, 암 환자 발생이 1%대로 낮춰지는 세상, 80대 노인들이 20대 청년들과 함께 일하며 낙원을…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46] 이승만 대통령 면담 마치고 경무대를 나오니…
인산 죽염으로 잘 알려진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은 각종 암치료 신약을 발명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독창적인 한방 암치료를 설파하며 난치병 환자를 평생 치료했다. 선생은 만성 질환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이 없는 세상, 육신이 파괴되는 질병의 고통이 사라지는 세상, 암 환자 발생이 1%대로 낮춰지는 세상, 80대 노인들이 20대 청년들과 함께 일하며 낙원을…
더 읽기 » -
동아시아
[인산 김일훈 45] 이승만 대통령과 마주한 외로운 선구자
인산 죽염으로 잘 알려진 인산 김일훈(1909~1992) 선생은 각종 암치료 신약을 발명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해방 후에는 독창적인 한방 암치료를 설파하며 난치병 환자를 평생 치료했다. 선생은 만성 질환으로 병원을 들락거리는 일이 없는 세상, 육신이 파괴되는 질병의 고통이 사라지는 세상, 암 환자 발생이 1%대로 낮춰지는 세상, 80대 노인들이 20대 청년들과 함께 일하며 낙원을…
더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