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유협(劉勰, 465년경~520년)은 글을 잘 쓰려면 성정을 잘 닦아야 한다고 말한다. 글을 통해 감정과 이성이 밖으로 드러나므로 한사코 성정을 도야(陶冶)하라고 말한다.
감정의 움직임으로 언어가 형성되고 이성이 발동함으로 문장이 구현된다. 이는 감정과 이성이 저 깊은 내부에서 밖으로 드러나고 내용이 안에서 바깥으로 나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재능에는 평범한 것과 뛰어난 것이 있고, 기질에는 강건한 것과 유순한 것이 있으며, 학식에는 천박한 것과 심원한 것이 있고, 습관에는 정아(正雅)한 것과 비속한 것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성정(性情)으로부터 조성되고 관습과 풍습에 의해 도야된다. 夫情動而言形,理發而文見,蓋沿隱以至顯,因內而符外者也。然才有庸儁,氣有剛柔,學有淺深,習有雅鄭,並情性所鑠,陶染所凝。
성정이란 개념은 성리학에서 많이 다룬 핵심 개념이다. 성은 본성이고 정은 성이 외부 사물과 접촉할 때 드러나는 마음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성리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성(性)을 이(理)에, 정(情)을 기(氣)의 발현에 가깝게 이해하였다. 이(理)는 이성(理性)을 말하고 성품(性品)이다. 기(氣)는 감정을 말하고 기질(氣質)이다.
조선 성리학에서 퇴계 이황은 이기이원론을 주장했고, 율곡 이이는 이기일원론을 주장했다. 이황은 이(理)를 기(氣)보다 우위에 두었고, 이율곡은 이기(理氣)의 혼연한 통일로 보았다. 중요한 것은 양측 모두 이기가 서로 갈라져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불상리(不相離)를 기본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나는 생각한다. 하늘과 땅, 해와 달, 지구와 만물이 성질만 다를 뿐 하나의 우주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음양강유의 성질이 어우러져야 하듯, 이 또한 분리될 수 없는 관계라고 말이다.
퇴계와 율곡보다 백여 년 앞서 세종이 창제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도 이기론(理氣論)을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온다. 이 문장을 꼭 살펴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람의 이성과 감정이 말과 글로 드러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초성, 중성, 종성 글자가 어울려 이루어진 글자로 말할 것 같으면 또한 동과 정이 서로 뿌리가 되고 음과 양이 엇바뀌어 변하는 뜻이 있으니, 동이란 하늘(天, 초성)이요, 정이란 땅(地, 종성)이며 동과 정을 겸한 것은 사람(人, 중성)이다. 대개 오행이 하늘에 있어서는 신(神)의 운행이요, 땅에 있어서는 바탕(質)의 이룸이요, 사람에 있어서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신의 운행이요, 간·심·비·폐·신(肝心脾肺腎)장이 바탕의 이룸이다. 초성에는 발동의 뜻이 있으니 하늘이 하는 일이요, 종성에는 그치고 정해지는 뜻이 있으니 땅이 하는 일이다. 중성은 초성의 생겨남을 받아 종성의 이룸을 이어주니 사람이 하는 일이다.”
하나의 말씨와 글씨를 만들려면 하늘과 땅, 즉 음과 양의 두 씨가 있어야 하는데, 하늘의 씨가 초성이고 땅의 씨가 종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초성과 종성, 이 두 씨가 엄마 자궁과 같은 역할을 하는 중성(中聲)에서 만나 마침내 하나의 글씨와 말씨가 생겨난다고 이야기한다. 이는 후대 퇴계와 율곡이 전개한 불상리(不相離)의 이기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하늘소리인 초성은 인의예지신의 신(神)을 주관하고, 땅의 소리인 종성은 간·심·비·폐·신의 오장을 주관한다고 말한다. 옛 동양의학에서는 사람의 몸을 하늘과 땅으로 나누어 머리를 하늘로, 오장이 있는 아래쪽 몸을 땅으로 구분했다. 머리에는 신경계를 주관하는 뇌가 있으므로 신기(神氣)를 주도한다고 했고, 오장은 땅에서 얻은 물과 곡식을 소화시켜 정미(精微)한 에너지를 만든다고 하여 정기(精氣)를 주관한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몸은 정기(精氣)와 신기(神氣)가 통일되어 기합(氣合)을 이룬 기물(氣物)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말하는 삼성(三聲)의 원리는 머리 쪽에서 인의예지신의 초성이 발동하는데 이것을 이성(理性)의 이(理)라고 볼 수 있고, 오장에서 발동하는 종성은 오감·오미·오정의 감정(感情)을 다루는 기(氣)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초성은 말과 글에 이성의 씨앗으로서 뜻(意)을 담고, 종성은 감정의 씨앗으로서 맛(味)을 담는다. 한국말과 글은 이렇게 뜻과 맛, 즉 의미(意味)를 품은 두 씨가 가운데 소리인 중성 모음에서 만나 비로소 생겨난다.
그래서 한국음악은 뜻과 감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음악의 장점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만물의 소리와 표정들이 지닌 실질적인 도량형(度量衡)을 자연스럽게 말하고 글로 표현하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 한국말과 글은 의미가 실질적으로 전달되므로 말과 글이 품고 있는 성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면 그 성품과 기질이 환하게 들여다보인다. 유협이 성정을 도야하라고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예가들은 서여기인(書如其人)이라고 말한다. 글씨가 곧 그 사람이라는 뜻이다. 글씨가 그러하다면 말과 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유협은 말하기를 성정은 재능, 기질, 학식, 습관을 통해 드러난다고 했다. 성정은 저마다 선천적으로 타고나지만 후천적인 노력을 통해 얼마든지 도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능의 잘나고 못남, 강건하고 유순한 기질, 배움의 깊고 얕음, 바르고 못된 습관 등을 끊임없는 수양을 통해 조화롭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나는 30대의 좋은 시절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산으로 독공을 간 이유가 바로 못난 성정을 도야하기 위해서였다. 재주와 기질과 학식과 습관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 한사코 성정을 성찰하고 계량하면서 하나씩 고쳐 나갔다. 재능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선대 명창들의 뛰어난 재능을 훔쳐 듣기에 바빴고, 투박하고 거친 기질은 산천에 널린 꽃과 새와 바위와 물과 나무들의 표정과 습성을 통해 순화시켰다. 아둔한 지혜는 수많은 독서와 명상을 통해 밝게 했으며, 이러한 것들을 엄격한 성찰 속에서 실천하는 습성을 유지한 덕분에 부족한 부분들이 조금은 세련되어 갔던 것 같다.
나는 소년 같은 가늘고 여린 목소리를 두텁고 실한 목소리로 바꾸려고 무리한 발성법을 수년 동안 무모하리만큼 철저하게 수행했다. 마치 아름드리나무가 다양한 판재로 켜져 용도에 맞는 기물이 되듯, 풍부한 성량으로 폭넓은 성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스승이신 성우향 명창께서는 얇은 내 목소리를 두고 이렇게 훈도하셨다.
“땅을 호미로 깔짝깔짝 파서 일궈 갖고 어디 곡식이 야물게 나오것냐. 쟁기로 푹푹 파 재껴서 거름을 잘 헌 밭에서 열매가 야무지게 영글제!”
“머시메가 되아갖고 가시내 맨키로 얍싹허게 소리허믄 쓰것냐. 도봉산 밀고 가드끼 푹푹 파서 밀고 가란 말이여.”
그렇게 되기까지 20년이 걸렸다. 그래도 겨우 흉내를 낼 뿐이니 참 어렵고 징한 공부였다.
붓글씨를 논하는 서론(書論)에서도 코끼리가 강을 묵직하게 밟고 건너가듯 글을 쓰라고 말한다. 이를 향상도하(香象渡河)라 한다. 개미의 걸음과 코끼리의 걸음은 다르다. 때로는 개미처럼 가볍고, 때로는 코끼리처럼 육중해야겠지만, 이쑤시개로는 경회루의 대들보를 대신할 수 없듯이 소용(所用)의 경계에는 대소경중(大小輕重)의 구별이 있는 법이다.
무언가를 개선하여 질을 높여 간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표면적인 탈바꿈은 임시방편으로 가능할지 몰라도, 환골탈태(換骨奪胎)의 진일보를 원한다면 근원이 되는 성정을 변화시켜야 한다. 모든 것은 성정에서 비롯된다고 유협은 결론짓는다.
“각 사람의 저 깊은 곳에 존재하는 재능에 대해 설명하자면, 기질은 그 사람의 사상과 감정을 충실하게 하고, 사상과 감정은 언어와 문장을 확립하게 한다. 이렇듯 훌륭한 작품을 산출함에 있어 그 사람의 성정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없다. 才力居中 肇自血氣;氣以實志,志以定言,吐納英華,莫非情性.”
결국 말과 글은 기술의 산물이 아니라 성정의 열매다. 아무리 문장을 꾸미고 소리를 다듬어도 그 바탕이 되는 성정이 흐리면 그 흔적은 반드시 드러난다. 그래서 유협은 문장을 배우기 전에 먼저 사람됨을 닦으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평생의 공부로 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