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순절이 끝나갈 무렵이면, 나는 늘 한 장면 앞에 멈춰 서게 된다. 빌라도 앞에 선 예수이다. 세상의 힘과 계산이 소용돌이치는 그 자리에서 예수는 자신을 과장하지도, 변명하지도 않는다. 오직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왔다고 말할 뿐이다. 그분이 대제사장의 질문 앞에서 “Ego eimi(나는 그다)”라고 고백하던 순간의 맑은 울림은, 빌라도 앞의 침묵과 절제 속에서도 여전히 미묘하게 빛을 발한다. 그분의 존재는 세상의 분류와 기준을 거부하고, 오직 진실함으로 드러난다.
오래전에 박귀훈 신부님이 들려준 ‘분모와 분자’ 이야기가 있다. 좋은 재료로만 좋은 음식을 만드는 사람보다, 하찮은 재료로도 훌륭한 음식을 만들어내는 요리사가 더 뛰어나다는 비유이다. 나는 그 비유를 들었을 때 조용히 웃었다. 내 삶의 분모가 이미 너무 커져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의사, 해부학 박사, 군 병원에서의 책임 같은 것들이 분모가 되면, 웬만해서는 높은 점수를 받기 어렵다. 조금 잘해도 당연한 일이 되고, 조금 부족하면 기대 이하가 된다. 분모가 커진다는 것은 사람들이 보기엔 높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가장 쉽게 흐려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예수 앞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앞에서는 학벌도, 직책도, 계급도, 업적도 모두 내려놓을 수 있다. 마치 분모가 사라지고, 모든 것이 초기화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면 남는 것은 단 하나, 내가 실제로 만들어낸 작은 선과 작은 사랑뿐이다. 분모가 아니라 분자가 나를 말해주는 자리이다.
병원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화려한 경력을 기억하지 않는다. 수술실의 조명 아래에서 내가 가진 분모는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다. 대신 손끝의 작은 성의—후배에게 보여준 한 가지 원칙, 장병들의 상처를 꿰매며 잃지 않으려는 존중, 환자의 불안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려는 마음—그것들이 분자가 되어 조용히 남는다. 예수 앞에서 내가 고백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작은 분자들일 것이다.
사람들은 빌라도가 던진 질문을 기억한다. “당신은 누구인가?”
그러나 사순절의 끝에서 나는 다른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고 싶어진다.
예수 앞에 선 나는 누구인가?
그는 내가 가진 분모를 묻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답하도록 초대하는 듯하다.
“하찮은 재료로도 선(善)을 만들고 싶었던 사람.”
“조용히 사랑하고, 조심스럽게 치유하려 했던 사람.”
그 고백이면 충분하다.
예수의 정체성은 진리 앞에서 드러났고,
나의 정체성은 예수 앞에서 조용히 제 모습을 찾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