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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27] 연해주 전장 누빈 김경천, 독립군 총사령관에서 수용소의 죽음까지

김경천이 방문한 하르빈 역사 1920년대 / 하르빈 안중근의사기념관

연해주로 출발하는 제국의 장교 출신 김경천의 목표는 5천 명의 독립군 병력을 모집하여 두만강을 넘어 고국으로 진공하는 것이었다. 세계 정세와 일본의 군사력을 감안할 때 순진한 청년 장교의 무모한 꿈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숭고한 꿈을 가슴에 간직하고 연해주 벌판으로 달려 나갔다.

김경천의 연해주 투쟁은 3단계로 이어진다. 1919년 말부터 1922년 9월까지 무장부대 조직과 치열한 투쟁, 1922년 말부터 1935년까지 무장 해제 후 민간인으로 활동이다.

마지막으로 1935년부터 1942년까지 간첩 혐의로 구금 및 강제 수용, 그리고 억울한 죽음과 1950년대 기구한 명예 회복 과정이다.

서간도에서 연해주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1919년 말 무기 확보 차 신흥무관학교를 떠난 김경천은 멀고 먼 대륙 길을 열흘을 걸었다. 길림에 도착하여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는 남만주 철도에 탑승하게 된다. 여기에서 장춘(창춘)까지는 일본의 철도 관할로 경찰과 헌병의 검문을 피해 극도로 조심해야 했다. 소련이 관할하는 시베리아 철도 중국 구간(동중철도, 동청철도) 중추역 하르빈에 도착했다. 그는 여기서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장렬한 현장을 답사하고, 상상 속에 그리던 유려한 송화강변을 거닐며 향후 일정을 구상하게 된다.

낯선 초행길이었지만 러시아어에 능숙한 동포 청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의 국경 도시 우수리스크(니콜스크-우수리스크, 쌍성자, 소왕령)에 잠입하는 데 성공했다.

우수리스크 시청사,호랑이가 상징문양이다.

우수리스크는 북만주 하르빈, 하바롭스크, 연해주를 연결하는 교통 요충으로 모든 한인의 집결지이며 생활 터전인 도시였다. 여기서 김경천은 연해주 독립운동 조직과 연결이 되었다. 우수리스크 외곽의 수이푼(추풍) 지역에는 많은 한인이 정착해 있었다. 이곳은 한인 독립투사들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르빈에서 가깝고 토양이 비옥해 농업에 성공한 부유한 한인들이 많았다.

국경에서 가까워 일본군의 사주를 받는 만주 마적단의 극심한 약탈과 공격에 수이푼 지역 대부분이 치안이 무너지고 큰 피해에 노출되어 있었다. 한인(고려인, 이하 한인으로 통일함)촌에서 자력 방어를 위해 일본 육사 출신 교관 김경천을 초빙했다. 한인 청년들의 군사 훈련에 매진하며 연해주에서 그의 무장 투쟁이 시작되었다.

투쟁은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1920년 3월 12일 러시아 빨치산군과 한인 유격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니콜라예프스크(니항)를 공격하며 일본군과 민간인, 외교관을 몰살시킨 니항 사건이 발생했다. 니항 사건에 일본은 17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참혹한 보복 작전을 연해주 전역에서 전개한다.

힘이 앞서는 국제 사회의 냉혹한 논리 속에 수천 명의 한인과 러시아인이 살해당했고 한인촌을 초토화시켰다(신한촌 4월 참변). 러시아 한인의 대부 최재형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한인촌에 머무르던 김경천도 일본군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살아 나왔다. 마치 2023년 10월 하마스 무장 정파에 의한 인질 납치 사건에 대해 이스라엘 측이 가자 지구에서 민간인을 대상으로 참혹하게 보복한 것이 연상된다.

일본군과 유격전이 벌어진 수찬 찌그로바강

국제적 비난이 고조되자, 간계한 일본군은 만주 마적을 매수하여 한인 마을을 지속적으로 공격했다. 연해주 수찬(수청) 지역은 우수리스크에서 동쪽으로 떨어진 시호테알린 남쪽 끝의 험준한 산악 속 대분지였다.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농업에 종사하며 성공적으로 정착한 지역이었다. 이곳까지 만주 마적단이 출몰해 한인촌을 유린했다.

전쟁은 군인에게 기회가 된다. 1920년 4월 김경천은 연해주 수찬 지역 인근 한인 500여 명의 병력을 편성하고 훈련시켰다. 때마침 마적 380명이 공격해 오자 마적 근거지를 반격 기습한다. 마적 360여 명을 사살하고 300정 이상의 소총과 말을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게 된다. 망명 이후 최초의 대승리였다. 일본에 추종하는 세력을 척결한 것이다.

노획한 말 중 백마 한 마리를 김경천이 타고 다니며 “백마 탄 김 장군” 별명이 동포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된다. 러시아 혁명 당국으로부터 ‘수찬 지역 군정관’으로 지역 통치권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수찬 지역은 치안, 행정, 조세, 군자금 조달까지 무리 없이 감당하며 연해주 한인 사회의 자치 모델이 되었다.

홍범도 장군의 흉상, 전쟁기념관

‘만주 마적 떼를 격퇴하는 연해주 조선인 마적 사령관 김응천’, 백마를 타고 산야를 달리는 김 장군 이야기가 동아일보 1920년 8월 18일 자에 뒤늦게 보도되었다.

경성의 지인들과 일본 육사 후배들은 마적 사령관 김응천이 김경천의 가명임을 알 수 있었다. 경성 사직동에 남아 망명 사건으로 고초를 겪던 그의 아내도 이 보도로 그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그가 떠나온 만주에서는 1920년 6월 7일 북간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재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이 일본군 백여 명을 몰살시키고 승리하는 쾌거가 있었다.

10월 21일에는 북만주의 김좌진 부대가 청산리에서 일본군 1개 대대를 제압하는 대승 소식이 전해진다.

승리의 환호도 잠시, 이 패배를 만회하려 출병한 일본군에 의해 간도 지역 조선인 4천5백여 명의 학살과 약탈, 방화, 강간의 처참한 보복(경신참변)이 자행된다.

김좌진 장군의 흉상, 전쟁기념관

만주의 독립군도 소만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피신하게 된다. 이렇듯 연해주와 만주에서 한인(고려인)들은 망국의 설움과 일본군에 의한 끝없는 고통을 또 겪어야 했다.

전쟁에 항상 승리가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1921년 10월 연해주 수찬 지역 신영거우(니콜라예프카) 전투에서 김경천은 위기에 빠졌다. 500명의 부대가 1개 사단의 러시아 백군과 일본군의 포위로 250여 명이 사망하고 부대는 괴멸되었다. 김경천과 부대원 수십 명만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왔다. 신영거우 전투 패배 소식은 고국 땅에도 알려져 ‘김경천 전사설’이 1921년 11월 21일 자 동아일보에 보도되었다.

패배를 설욕하려는 김경천에게 1922년 1월 한인 유격대와 러시아 빨치산 부대를 지휘하는 기회가 온다. 영하 30도 눈밭에서 펼쳐진 이만(달네레첸스크) 지역 탈환 작전은 야간 기습 공격으로 일본군과 백군 900여 명을 몰살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극동 내전 역사에서 위대한 장을 성취했다고 평가되는 대승이었다.

우수리스크의 김경천 /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연해주 혁명군사위원회가 그의 능력과 공적을 높이 평가해 ‘연해주 지역 한인의병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홍범도, 김좌진에 이어 김경천은 식민지 조선인들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독립군 간 내부 분열과 노선 갈등이었다. 연해주 한인 무장부대 간에도, 연해주 정착 한인(러시아 국적자 고려인)을 중심으로 계급 혁명을 우선하는 주장(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이 있었다. 또 하나는 상해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상해파 민족주의자들의 조선 독립 우선론(상하이파 공산당)이 있어 두 파는 사사건건 격돌했다.

김경천은 조국 독립이 우선해야 한다는 민족주의를 지지했다. 그의 망명은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한 것이지 계급 혁명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 논쟁은 단순히 연해주 독립운동의 향방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부터 민족주의(자유민주주의로 발전)와 공산주의의 노선 대결은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최대의 논쟁과 갈등으로 부각되었다. 해방 정국의 좌우 갈등, 남북한의 분단과 북한의 침략이라는 비극으로 확대되었다.

1918년부터 1922년까지 계속된 시베리아 내전은 러시아 지역 조선 독립운동가와 김경천에게는 일본군을 무력으로 공격할 수 있는 호기였다. 1922년 말 일본군의 철수로 극동 지역 전쟁이 종료되며 소련 당국은 모든 빨치산 조직의 무장 해제와 원대 복귀를 명령하게 된다. 약 4년간의 합법적 무장 투쟁은 끝이 나며 김경천을 비롯한 조선 독립군 조직은 해체되고 만주로 이동하거나 지하로 잠적해야만 했다.

새로운 투쟁의 호기가 다가올 때까지 홍범도, 김경천 모두 생업에 종사하며 기다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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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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