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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기 26] 김 알렉산드라…망명의 끝에서 총살된 고려인 여성 혁명가

1918년 9월 16일 새벽- 하바롭스크 아무르강 우조스 절벽, 우아한 자태의 조선인 여성 시신이 절벽으로 던져져 아무르강으로 사라졌다. 죽기 전 그녀가 외친 마지막 말은 “조선독립 만세! 사회주의 만세! 여성의 자유 만세!”였다.

하바롭스크 지역의 아무르 역사기행은 이 여인으로부터 시작했다.

김 알렉산드라, 우수리스크 최재형기념관

이목구비가 수려한 지성미가 풍기는 미인, 이 여인의 이름은 ‘김 스탄게비치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한국명 김애리 1885.2-1918.9)’이며, 러시아 국적의 조선인(고려인)이었다.

그녀는 민족운동가이며 조선인 최초의 사회주의자이자 여성 노동운동가였다.

김 알렉산드라는 어떻게 극동지역의 엘리트 여성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어떤 사연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검푸른 아무르강에 던져졌을까?

두만강 한-러 국경 지신허의 현재 모습

김 알렉산드라는 1885년 연해주 추풍(수이펀) 샤넬리코보(영안평) 지역에서 출생한 러시아 이주 조선인(고려인) 2세였다. 추풍 지역은 고려인(러시아어, 카레이츠 한국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우수리강 남쪽의 비옥한 농촌이었다. 이 지역은 서쪽으로는 북만주 하르빈과 연결되고, 근처에 우수리스크 도시가 있어 많은 고려인들이 뿌리내린 곳이다.

1869년(기사년) 여름, 함경도 지역을 덮친 폭우와 대홍수로 농경지가 매몰되고 대기근이 몰아쳤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을 내내 내린 서리와 우박은 전 함경도 지역을 황폐화시켰다. 부패한 지방관리들은 이 어려운 시기에 구호대책을 세우기보다는 가렴주구에 혈안이 되었다.

김 알렉산드라의 부친 김두서(1850년대 출생 추정)는 이 시기, 함경북도 경흥에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부모를 따라 연해주로 탈출한 전형적인 조선인이었다. 소년 김두서는 이주민 대열에 합류하여 러시아 국경 근처 한인 최초의 정착지인 지신허에 거주하였다. 지신허는 조선인 이주자가 증가하면서 점차 경작할 땅과 집도 부족해져 생활 여건이 어려워졌다.

수이펀(추풍) 지역의 기름진 흑색 토양

이주 조선인(고려인)들은 유목민처럼 생계의 터전을 찾아 끝없이 이동하는 근대의 개척자였다. 김두서는 곤경의 지신허를 벗어나 근처의 항구 포시에트로 이주했다. 여기서 배를 얻어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한다. 먼저 정착한 고려인들을 따라 그는 우수리강 남쪽의 곡창지대 수이펀(수분하, 추풍) 지역 샤넬리코보로 이동해 농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넓고 비옥한 토양의 샤넬리코보 지역은 기아의 고통을 벗어나게 해준 보금자리가 되었다.

김두서(김 표트르)는 선천적으로 근면하며 어학에 재능이 있었다. 러시아 정교로 개종하고 부지런히 익힌 러시아어는 그에게 가장 큰 재산이 되어 있었다. 농사꾼 김두서는 러시아어 통역도 하고 청부업에 종사하며 생활이 풍족해진다. 이때 조선 여인과 결혼하여 낳은 딸이 1885년생 김 알렉산드라(한국명 김애리)였다. 불행히도 유년기에 어머니가 병사하고 자상한 아버지의 보살핌으로 컸다.

샤넬리코보의 초등학교, 조명희 작가 등 독립유공자 교사와 졸업생

샤넬리코보에서 러시아 초등교육을 마치고 우수리스크의 중학교로 유학했다.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선각자 아버지의 배려가 있었다.

잠시 정세를 조선으로 돌려보자. 김 알렉산드라가 출생한 1885년 즈음, 조선에는 김옥균 등 개화파의 갑신정변이 실패하고 반동적 민씨 정권이 기세를 부리던 때였다.

천진난만한 러시아 아이들의 학교로 변한 구 고려인 초등학교

다행히도 1882년 미국과 수교를 시작으로 서양 각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1885년 개신교가 전파되었다. 서양의학과 신교육이 도입되고 여성에게도 교육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 그때였다. 이화학당과 숙명, 진명여학교에서 여성교육을 시작한 시기와 동시기였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한 박에스더(1877-1910)가 선교사의 도움으로 1896년 볼티모어 의과대학에 입학한다. 박에스더는 천신만고 끝에 조선 최초의 여의사가 되어 귀국했다. 박에스더가 조선 여성의 치료와 의학 연구에 진력을 다한 시기의 활동과 거의 동일한 시기이다. 여성의 선구적 삶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도 김 알렉산드라에게서 꽃을 피게 된다.

김 알렉산드라가 10살 무렵인 1896년이었다. 러시아는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 편을 거들며 일본의 요동반도 진출을 막아준다. 그 대가로 1896년 북만주 지역 철도 부설권(일명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했다. 동청철도는 러시아 아무르주의 수도 치타-중국 만주리-하르빈-무단장(목단강)-수이펀허(수분하)-러시아 우수리스크-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만주 횡단 노선이었다.

김 알렉산드라가 이주한 하르빈의 현재 모습

동청철도는 김두서에게 또다시 인생 역전의 기회를 부여한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중국 하르빈으로 이주했다. 동청철도 건설로 인해 수많은 고려인과 중국인이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게 되자, 유능한 러시아어 통역 요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896년 아버지를 따라 하얼빈에 이주한 김 알렉산드라는 열 살 때부터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배우고 만주의 생활을 익히게 되었다. 조선어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말하고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말할 수 있는 재원으로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하르빈에서 부친이 갑자기 돌아가시고 10세부터 고아가 된 그녀의 일생은 고립무원의 처지였다. 그녀는 부친의 친구이며 철도공사 엔지니어였던 폴란드인 ‘스탄게비치’에게 맡겨져 자라며, 1902년 그의 아들 스탄게비치와 결혼하게 된다.

러시아에서 만주로의 이주, 부모의 갑작스러운 사망, 폴란드인과의 국제결혼, 러시아로의 재이주 과정은 감내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20세기 초 조선의 여인이 경험하기 쉽지 않은 국경을 넘나드는 역경의 삶이었다. 고통은 그녀를 강하게 만들고 안목을 비약적으로 변화시켰다.

폴란드인 남편과의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도박과 술로 방탕한 남편과 이혼한 후 두 아이를 데리고 1905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왔다. 1907년까지 주부로서 고등교육을 수료하며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에 참여한다.

이때부터 러시아 관헌의 추적을 받으며 만주와 러시아의 접경 지역을 오가며 도피의 삶이 시작되었다. 고향 샤넬리코보의 고려인 학교 교사로서 봉직하며 모국 조선인의 이주 역사와 생활을 배웠다. 그녀는 조선인으로 자아를 깨닫고 민족의식을 깊게 받아들였다.

1910년에는 러시아 정교회 신부였던 오 바실리(오가이)와 재혼한다.

1900년대, 활력 넘치는 고려인 남녀 학생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많은 고려인들이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우랄 지역으로 이동한다. 고려인들은 우랄 지역에서 무기 생산과 벌목 노동에 종사하게 된다. 열악한 노동 조건과 임금 미지불 분쟁이 벌어지나 언어 장벽으로 해결에 어려움이 많았다.

블라디보스토크 교포 모임 ‘고려인 민회'(교민회)에 긴급히 도움을 요청하는 청원이 들어왔다. 1914년 고려인 민회에서는 러시아어에 능통하고 노동 문제에 지식이 있는 김 알렉산드라를 우랄 지역으로 파견하게 된다. 그녀는 정교회 신부인 고려인 오 바실리와 재혼하여 두 자녀를 둔 어머니였으나 자원하여 우랄 지역으로 간 것이다.

우랄 지역에서 조선인 노동자의 임금 문제를 해결하고 권익을 대변하며 투쟁하였다. 중국어에도 익숙한 그녀는 중국인 노동자들의 권익도 대변하여 지역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917년 2월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면서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볼셰비키에 가입하여 책임자로 부상하게 된다.

당에서는 극동 지역 혁명을 위해 고려인 출신인 그녀를 하바롭스크로 파견한다. 그녀는 한인 노동자들을 보호하고 조선의 해방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이 길을 가야 한다고 믿었다.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이인섭과 함께 1917년 7월 말 하바롭스크에 도착하였다.

하바롭스크, 김 알렉산드라가 체포되어 구금된 건물

1917년 10월 개최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극동 지역 대표자 회의에 아무르 지역 대표로 참가하고, 1917년 말에는 극동인민위원회에서 하바롭스크주 책임비서 겸 외교부장(외무장관)으로 선출되었다. 조선 출신 러시아 국적자(고려인)가 이룬 최고의 성취를 이루어 낸 것이다.

때마침 그녀는 조선인 망명 지도자 이동휘가 아무르주 감옥에 간첩 혐의로 억울하게 수감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구명운동을 하여 그를 석방시켜 하바롭스크로 귀환시켰다.

이동휘와 김 알렉산드라는 극동 정세를 논의한 결과 조선의 독립과 노동자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결론을 냈다.

1918년 4월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결성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며 이동휘, 김립, 유동열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이동휘를 대표로 선출하게 된다. 한인사회당을 결성한 장소가 칼 마르크스 거리 22호, 극동 지역 볼셰비키 운동의 본산지였다.

아무르강의 여객 수송선

이후 극동 정세는 일본과 미·영·불 군대의 국제 간섭으로 볼셰비키 정부가 무너지고 백위군이 정권을 잡는 역전 상황이 벌어진다. 1918년 9월 4일 하바롭스크도 백위군과 일본군이 장악한 결과 김 알렉산드라를 비롯한 간부들은 다시 바이칼 쪽으로 대피해야 했다.

9월 10일 하바롭스크를 출발한 마지막 탈출선 코르프에 승선하고 아무르강을 빠져나가는 중 백위군의 추격 선박에 의해 김 알렉산드라는 체포되었다.

하바롭스크로 끌려와 백위파의 엄격한 조사와 혹독한 고문과 회유가 반복되었다. 김 알렉산드라는 고문과 회유에 흔들리지 않았다. 완강한 그녀는 백위파의 가혹한 고문과 가해로 고운 얼굴에 칼자국을 남긴 채 숨을 거두게 된다. 이 건물이 칼라리나 63번지 건물이다.

그녀의 나이 33세, 한 남자의 아내이며 두 아이의 엄마는 아무르강에 조선 독립과 사회주의, 여성 자유의 영혼을 싣고 그렇게 떠났다.

1918-1920년 내전 기간 중 희생된 애국자를 기리는 동판

건물 벽에는 “1918-22년까지 백위파와 국제 간섭군에 의해 수백 명의 빨치산들이 고문을 받았던 곳”이라는 기념비가 남아 있다.

이 여인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가 하바롭스크 중심가 중요 건물 벽에 굳게 각인되어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 알렉산드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

아무르강에 푸른 별이 떠올랐다. 김 알렉산드라의 영혼이 영롱하게 떠올랐다.

죽음의 절벽 우조스 언덕은 하바롭스크를 개척한 하바로프가 상륙한 곳이며,

아무르 지역을 개척한 시베리아 총독 무라비요프의 동상이 보이는 하바롭스크의 성지였다.

아무르를 개척한 무라비요프 총독 동상 / 하바롭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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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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