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백성과 소통하는 ‘왕과 사는 남자’…‘단종 앓이’ 신드롬

권력은 강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어린 왕의 억울한 죽음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단종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계속 되살아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본문에서 <왕과 사는 남자> 포스터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팝콘을 먹으며 영화를 관람했다. 아내의 권유로 본 작품은 <왕과 사는 남자>로,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1층에 있는 메가박스에서 3월 9일 오후 5시 15분 상영을 관람했다. 관람료는 성인 기준 1만5천 원이지만 경로우대로 부부가 합해 1만6천 원을 지불했다.

이 영화는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8.18~1457.11.16)의 짧은 생애를 모티프로 한 작품으로, 최근 관객 수가 빠르게 늘면서 이른바 ‘단종 앓이’라고 할 만큼 관심을 끌고 있다. 영화 개봉 이후 단종 유배지인 강원도 영월 청령포를 찾는 방문객도 크게 늘었다고 한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는 강원도 영월 청령포(淸泠浦)를 주요 배경으로 한다. 이 작품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상상력을 더한 이른바 팩션(faction) 사극으로, 폐위된 단종 이홍위가 영월 유배지에서 마을 사람들과 교류하며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과정을 그렸다. 영화 속에서는 촌장 엄흥도를 비롯한 주민들과 단종이 인간적으로 교감하는 장면이 강조된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 단종의 유배 생활은 영화처럼 자유롭지 않았다. 단종은 철저한 감시 속에 지냈으며 백성과 자유롭게 접촉했다는 기록은 없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 위에 상상력을 더해,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는 인간적인 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관객들이 공감하는 지점도 바로 여기에 있다.

단종의 생애는 교과서나 역사책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만, 폐위 이후의 삶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영화는 궁중 권력 다툼 속 희생양이 된 어린 왕이 아니라, 유배지에서 백성과 호흡하는 인간적인 지도자의 모습으로 단종을 재해석한다. 실패한 왕이지만 정의로운 인물로 그려지는 설정이 요즘 관객의 정서와 맞닿아 있다.

최근 영화의 영향으로 영월 청령포 방문객이 크게 늘었다. 청령포는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이고 뒤쪽은 절벽으로 막혀 있어 ‘육지 속의 섬’이라 불리는 곳으로, 배를 타야 들어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청령포를 둘러본 뒤 단종의 능인 장릉을 함께 찾는 경우가 많다. 단종 관련 도서 판매도 크게 증가했다고 한다.

유배 형벌은 조선시대에 중대한 죄를 범했지만 곧바로 사형에 처하지 않을 때 내려지던 처벌이다. 조선은 신분 질서를 중시했기 때문에 양반이나 왕족에게는 공개 처형 대신 유배나 사약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 중에서도 가장 엄한 형벌은 위리안치로, 가시나무 울타리를 둘러 외부와 완전히 격리하는 방식이었다.

단종은 조선의 제6대 임금으로 이름은 이홍위이다. 문종의 아들로 태어나 1452년 열두 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린 임금을 보호해 줄 왕실 내부의 기반이 약했다.

당시 정국은 대신 세력과 종친 세력이 충돌하는 구조였다. 영의정 황보인과 좌의정 김종서가 어린 왕을 보좌하고 있었고, 세종의 아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 등 왕실 종친들의 영향력도 매우 컸다.

1453년 수양대군은 김종서 등이 권력을 독점하고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군사를 일으켰다. 이 사건이 계유정난이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며, 이후 단종의 권한은 크게 약화되었다.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왕위를 넘기도록 압박했고, 단종은 선위 형식으로 왕위를 내주었다. 수양대군은 세조로 즉위했고 단종은 상왕이 되었다.

그러나 성삼문·박팽년 등 집현전 출신 신하들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발각되면서 정국은 다시 흔들렸다. 사건 이후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단종은 처음 청령포에 머물다가 홍수 위험 때문에 관풍헌으로 옮겨 생활했다. 1457년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자결설과 사사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세조 정권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는 해석이 널리 받아들여진다.

단종의 시신은 바로 장례가 치러지지 못했고, 영월의 아전 엄흥도가 몰래 수습해 묻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숙종 때 단종이 복위되면서 무덤은 왕릉으로 정비되었고 지금의 장릉이 되었다.

조선 후기 사림 세력이 성장하면서 세조의 왕위 찬탈에 대한 비판이 커졌고, 숙종 24년 단종은 다시 왕으로 복위되었다. 이후 단종을 위해 목숨을 바친 신하들도 충신으로 추숭되었다.

최근 단종을 소재로 한 영화와 역사 콘텐츠가 잇따르면서 청령포와 장릉을 찾는 사람이 크게 늘고 있다. 어린 왕의 비극적인 삶에 대한 공감이 세대를 넘어 이어지면서 이른바 ‘단종 앓이’ 신드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은 강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고, 어린 왕의 억울한 죽음은 수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단종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계속 되살아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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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윤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서울대 보건학박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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