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칼럼

[이우근 칼럼] 포퓰리즘, 민주주의의 경고인가 유혹인가

이미지는 AI가 생성한 것으로, 포퓰리즘이 만들어낸 정치의 왜곡과 분열을 상징한다. 화면 곳곳의 한글 오자와 겹친 글자는, 혼란과 단절이 일상이 된 우리의 정치 풍경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아시아엔=이우근 변호사, 법무법인 클라스 고문변호사, 서울중앙지방법원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역임, 서울내셔널심포니오케스트라 명예지휘자] 대중영합주의로 알려진 포퓰리즘(populism)은 정치를 순수한 대중과 부패한 엘리트의 대립으로 보는 진영 논리로 무장한다.

기득권층에 대한 반감이 큰 서민 대중은 학계·언론계·사법부 등 제도권에 대한 불신이 깊고, 대의정치의 간접민주주의보다 카리스마 넘치는 정치지도자 중심의 직접민주주의를 더 반긴다. 지도자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나라를 향한 충성심에 비교될 만큼 강력해 보인다.

포퓰리즘은 기득권층이 일반 국민의 요구를 외면할 때 공동체의 위기를 알리는 경고가 되기도 한다. 포퓰리즘을 선동정치라고 공격하는 비난 역시 비합리적이고 무분별한 또 다른 선동정치가 될 수 있다.

지배계층의 정치적 탐욕을 비판하고 소외계층의 요구를 정치에 반영하려는 포퓰리즘은 민주주의의 참여도를 높이는 동력이 될 수 있다. 아르헨티나의 좌파 정치이론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Ernesto Laclau)는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구성 원리’라고 옹호했다. 그는 포퓰리즘을 악마화하지 않고, 오히려 기득권층의 권력 독점에 맞서는 새로운 헤게모니 전략으로 이해한다.

그에 반해,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은 라클라우의 대중주의를 ‘선거와 정치의 상품화’라고 비판한다. 유권자들이 제 입맛에 맞는 정부를 세우기 위해 돈으로 상품을 사듯 표를 던지는 선거의 상업화 때문에 진정한 정치가 실종된다는 것이다.

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는 정치를 ‘적과 동지의 구분’으로 파악한다. 적을 약화시키고 자기편을 강화하려는 노력이 정치행위의 지향점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진영 논리로 무장한 포퓰리즘과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그렇지만 적과 동지가 늘 고정적인 것은 아니다. 항상 다투기만 하던 정당들이 선거를 앞두고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특정 분야에서 손을 맞잡는 현상을 자주 본다. 그 맞잡은 손 뒤에는 각각의 포퓰리즘이 도사리고 있다.

독일의 유대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생각 없는 대중,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지 못하는 군중이 포퓰리즘이라는 괴물을 낳는다”고 경고했다. 포퓰리즘은 ‘순수한 인민’이라는 부족주의적 환상을 내세워 반대파를 배제하는 탈진실(post-truth)의 전체주의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서민 대중의 전폭적 지지로 정권을 거머쥔 아르헨티나의 페론과 베네수엘라의 차베스는 자본가와 엘리트를 적대시하는 좌파 포퓰리즘 정책으로 장기적인 국가 경영을 게을리하다가 나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독일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아 권좌에 오른 히틀러는 아리안 인종주의에 기초한 우파 포퓰리즘 정책을 펴다가 전쟁에서 패배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좌파 포퓰리즘이든 우파 포퓰리즘이든, 정책의 지속성과 장기적 전망, 그리고 재원 조달에 대한 면밀한 검토 없이 지나친 감성 자극과 복잡한 문제의 단순화로 실패를 자초한 사례가 셀 수 없이 많다.

스위스 국민은 모든 사람에게 2,500프랑(약 300만 원)씩 균등하게 지급하자는 기본소득 정책을 국민투표에서 76.9%로 부결시켰고, 법정 유급휴가 기간을 4주에서 6주로 늘리자는 제안을 67%로, 부자들에게서 상속세를 더 많이 걷자는 징벌적 증세안을 71%로 모두 부결시켰다. 나라의 예산은 남의 돈이 아니라 내가 낸 세금이라고 생각하는 스위스 국민은 포퓰리즘의 공짜 점심을 거부했다. 그들은 생각 없는 대중이 아니었다. 사려 깊고 합리적인 주권자였다.

좌파나 우파나 모두 포퓰리즘 전략을 즐겨 쓰는 한국 정치에서 포퓰리즘은 앞에 나타난 밝은 빛보다 뒤에 감춰진 어두운 그늘이 훨씬 짙다. 선거 때만 되면 등장하는 재정 확대 예산, 서민 복지 공약, 반대 세력을 배격하는 감정적 구호, 지지층을 단단하게 결집시키는 팬덤 현상이 좌우를 넘나들고, 정책 대립을 넘어 진영 갈등의 감정적 충돌로까지 이어진다.

졸렬하고 무분별하게 상대를 공격하는 여야 정치인들은 자신이 속한 정당이나 지지층과 얼마나 끈적한 일심동체를 이루고 있는가? 부패한 기득권 정치를 꾸짖는 개혁적 대안으로서의 포퓰리즘은 순수하고 긍정적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을 쟁취한 뒤에도 그 순수성이 계속 유지되는가는 전혀 다른 문제다. 우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우근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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