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엄동설한에 들려오는 봄의 소리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봄은 벌써 집 안팎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작은 길 언덕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하얀 렌턴로즈가 봄 처녀처럼 수줍게 피어 있었다.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써 내려간 『야생화 일기』를 떠 올렸다.-본문에서
[아시아엔=김태형 에모리대학교 의대 명예교수, 한국소아암협회 회장 역임, 美 애틀란타 거주] 며칠 전에 봄, 봄비에 관한 시 또는 수필을 보내라는 공지를 보았다. 마감은 일주일. 이곳 애틀랜타의 1월은, 내가 자라던 서울의 한겨울처럼 한 해 중 가장 매서운 추위를 품고 있다. 물은 얼어붙고, 집 둘레에는 잎을 모두 털어낸 나무들만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다. 소한이 이미 지났고 대한이 닷새 남았지만, 입춘까지는 아직도 두 주나 더 기다려야 한다. 두툼한 옷을 껴입고 책상 앞에 앉았으나, 머릿속은 온통 겨울뿐이라 봄에 관한 글의 첫 문장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문득, 오래전에 읽었던 셸리의 시 ‘서풍의 노래’ 한 구절이 스쳤다.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이 멀지 않으리.” 그 문장이 가슴 속에서 따뜻한 온기로 번졌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섰다. 혹시 봄의 전령이 이미 어딘가에 와 있지는 않을까, 기대를 품은 채.

먼저 집 앞 화단을 둘러보았다. 동백나무에는 제법 봉오리가 도톰하게 올라와 있고, 수선화 한 송이가 노란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햇볕이 잘 드는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목련에는 작은 봉오리들이 촘촘히 맺혀 있다. 앞마당의 잔디는 아직 누렇게 잠들어 있지만, 잔디 끝자락에 심어둔 분홍색 꽃잔디와 맥문동은 이미 봄빛을 띠고 있었다. 담벼락을 타고 오른 아이비 넝쿨은 녹색 잎을 품고 있었고, 집 둘레의 향나무와 소나무, 상록 관목들은 겨울을 견뎌낸 채 묵묵히 푸른 잎을 지키고 있었다. 난디나의 붉은 열매는 겨울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뒤뜰로 내려가 보니 몇 해 전 친구가 심어준 대나무가 어느새 숲을 이루고 있었다. 한쪽 텃밭에는 심은 작물은 없었으나, 언 땅 위로 냉이와 갓, 질경이가 질펀히 퍼져 있고, 방풍나물의 새순이 연둣빛으로 고개를 들고 있었다.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 봄은 벌써 집 안팎 구석구석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작은 길 언덕에는 아내가 좋아하는 하얀 렌턴로즈가 봄 처녀처럼 수줍게 피어 있었다.

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10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써 내려간 『야생화 일기』를 떠 올렸다. 보스턴에서 인턴 레지던트 수련을 받던 시절, 왈든 호수를 찾았고, 보스턴마라톤에 참가하면서는 그가 살던 콩코드 마을을 여러 차례 지났다. 그는 하버드 대학 시절 특별히 식물학을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초원과 연못, 강과 숲을 누비며 400여 종의 야생화를 기록했다. 눈 덮인 겨울에도 얼음을 깨고 식물을 관찰하던 집요한 시선은, 뭇 식물학자를 능가하는 열정이었다. 식물학자이자 시인이며 자연의 연인이라 불릴 만한 인물, 만약 그가 마흔넷의 짧은 생을 더 이어갔다면, 그의 기록은 위대한 식물도감이 되었을 것이다. 그가 가장 사랑한 꽃이 수련이었다는데, 왠지 고개가 끄덕여진다.

당나라의 두보와 이백, 북송의 소동파를 비롯한 중국의 문인들이 강에 배를 띄우고 노래한 봄의 시에는 봄날 강가의 화사한 빛과 향기가 넘쳐난다. 또한, 고려의 정지상, 조선의 송강 정철이 강물과 산수를 즐기며 봄의 정취를 아름답게 그려냈다, 그러나 눈 덮인 대지 위에서 생명의 미세한 기척을 찾아내던 소로의 시선에는, 또 다른 결의 봄기운이 깃들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산병원에서 일하던 시절, 이른 봄이면 아내와 함께 강화도 고려산의 진달래동산을 찾아 봄나들이를 갔다. 서울 근교의 개나리동산도 자주 찾았다. 그러나 거동이 불편해진 요즘 먼 곳의 꽃축제는 마음속 그림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쉽다.

며칠 전 과일을 많이 달게 하려고 가지치기를 해 더 앙상해진 복숭아나무, 대추나무, 감나무를 바라보며 혼자 웃었다. 아직은 꽃 소식은 들리지 않고 산수유도 노란 기운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벌써 봄은 다가오고 있었다. 진달래와 철쭉 개나리 그리고 하얀 산딸나무(Dogwood)꽃이 서로의 빛을 섞으며 우리 집 뜨락을 채우는 입춘에는 이 글을 다시 써야겠다. 진짜 봄에 관한 우리 집의 꽃 이야기를.

편집국

The AsiaN 편집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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