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요한계시록 22:20)
정말 편리한 세상입니다.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것들은 다 알 수 있습니다. 지식과 정보에 대한 접근성이 이처럼 좋았던 때가 인류 역사에 있었을까요? 어제 주문한 택배가 지금 어느 물류센터에서 몇 시 몇 분에 출발했고 우리 집에는 언제 도착할지 실시간으로 파악이 가능한 시대입니다. 택배 회사가 소비자에게 그 정보를 공개하지 않거나 누락하면 욕을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앎’을 ‘권리’라 말하는 시대입니다. 모르면 ‘알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느낍니다. 이처럼 인간은 앎을 갈망하는 존재입니다. 모르는 것을 견디기 어려워합니다. 인간에게 ‘모름’이란 일종의 불안이자 공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낯선 곳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 있는 상태를 우리는 본능적으로 위험하다 느낍니다. 많이 알수록 안전하다고 느껴서일까요? 우리는 알 수만 있다면 다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기독교의 종말론은 우리에게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속히’ 오신다고 하셨는데 2,000년이 지나도록 함흥차사이십니다. 당장 내일 오셔도 이상하지 않지만 1,000년 뒤에 오실 수도 있다는 이 불확정성, 이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데이터화하고 예측해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의 욕망에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종말의 일시를 정확한 숫자 정보로 제공하셨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우리는 그 정보를 얻는 순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를 멈추고 ‘일정 관리’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그날이 오기 직전까지 자신의 욕망을 극대화하며 살다가 마감 기한 직전에만 경건의 모양을 갖추려는 ‘계산’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조절이 가능하다고 착각하며 타락할 수 있는 데까지 타락하다가 결국 선을 넘어버려서 정작 신앙을 다 잃어버린 상태로 종말을 맞이하게 되는 상황은 불 보듯 뻔한 일입니다.
종말의 때를 알 수 없게 가려두신 건 우리의 신앙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무한한 배려입니다. 우리를 가장 순수한 신뢰의 상태로 이끄시는 초대입니다. ‘속히 오리라’는 말씀은 시간의 양적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빨리’라는 급박한 긴장이라기보다 ‘반드시’라는 든든한 약속입니다. 종말 신앙이란 손에서 계산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달력과 시계를 그만 보고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