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미디어칼럼

‘누미노제’ 앞에서 멈춘 말, 그때 열린 ‘전도’의 문

거친 십자가의 진리를 매끄러운 논리와 세련된 수사로 포장하는 것은 어쩌면 기만입니다.-본문에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고전 2:1)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요?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좋은 도구를 활용할 생각은 않고 미련하게도 그걸 버리겠다고 합니다. 더 명쾌하고 더 세련되고 더 유려한 말로 설교를 한다면 사람들에게 훨씬 유익할 텐데 말입니다.

바울이 처음부터 말의 지혜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에 오기 전 그는 아테네의 아레오바고 광장에 섰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멋진 변증을 펼쳤습니다. 탁월한 강연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느꼈던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해명하려 했던 시도가 하나님을 이성의 심판대 앞에 세워 토론 주제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행 17:18상) 복음이 당시 무수한 말쟁이들, 곧 소피스트들의 궤변 취급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복음이 그렇게 전해지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입니다.

그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폐기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십자가의 도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세계관과 부딪힙니다. 인간 이성으로 헤아릴 수 없는 깊이입니다. 전지전능한 신이 피조물에 의해 무력하게 살해당했다는 사건을 세상의 어떤 철학과 지혜로 헤아릴 수 있을까요?

거친 십자가의 진리를 매끄러운 논리와 세련된 수사로 포장하는 것은 어쩌면 기만입니다.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버리는 대신 ‘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떠는'(고전 2:3) 심정으로 사람들 앞에 섭니다. 이것은 자신감이 없거나 나약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진 거룩성과 영광스러움을 알기에, 그 압도적인 신비 앞에서 느끼는 누미노제(Numinose)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전달에 있어 가장 강력한 설득력이 아닐까요? 오늘날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 바로 이 떨림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들 시대의 호흡에 맞추어 매끄럽게 십자가의 도를 전하려다 정작 이 떨림을 잃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전하고 싶어 입을 열었지만 형언할 수 없는 신비에 말문이 막힐 때, 인간의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듣는 이에게는 믿음의 씨앗이 됩니다.

🎧잠깐묵상 유튜브로 듣기
https://youtu.be/VJWCRBf9W6o?si=xJfrVS7i4VBol058

석문섭

베이직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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