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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확 같은 부하 둔 대통령이 부럽소”…美대통령 아이젠하워, 이승만에 친서

40대 시절 신현확 전 총리

신철식이 자그마한 박스를 들고 나의 법률사무실로 들어섰다. 그가 박스를 나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우리 아버지에 관한 자료야.” 그가 연 박스 안에는 스크랩북이 보이고, 비망록 같은 낡은 서류들이 보였다. 그 옆으로 먼지 묻은 카세트테이프가 여러 개 있었다.

“어떤 것들인데?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인가?” 변호사인 나의 관점에서는 증거가 관심사였다. “그건 아니고,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가를 아는 데 필요할 것 같아서 가지고 왔어.” 그가 박스 안의 카세트테이프 쪽으로 시선을 보내며 말을 이었다.

“중앙일보 기자를 했고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인 김정탁을 알지? 우리 고등학교 동기 말이야. 그 친구가 아버지를 스무 번 가량 인터뷰했어. 그때 녹음했던 걸 복사해서 내가 가지고 있었어. 아버지의 육성이 담긴 녹음테이프야.” 김정탁 교수는 신문사 논설위원을 겸하면서 칼럼을 많이 쓰고 있었다. 기자정신에 투철한 친구였다. 아들인 신철식보다 훨씬 객관적인 시각으로 신현확 총리를 대했을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벽장에서 오래전에 쓰던 녹음기를 꺼냈다. 먼지를 털어내고 박스에서 꺼낸 테이프를 넣어 재생시켰다. 치지직 하는 잡음이 나며 말이 흘러나왔다.

“총리님은 한국 현대사에 깊이 관여하셨는데, 현장에서 겪으신 생생한 얘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자서전을 쓰실 생각은 없는지요?” 기자였던 김정탁 교수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내가 여태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내가 겪은 사건마다 누가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한 것 같아요. 진상을 폭로하는 식의 얘기가 될 수도 있고, 그럴 경우 관련된 분이나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게 되니까.” 신현확의 성품이 엿보이는 말이었다.

나는 그중 굵직한 사건의 제목이 적혀 있는 몇 개의 테이프를 먼저 골랐다. 신현확이라는 인물의 개성과 인간적인 그릇을 파악하고 싶었다. 나는 변호사다. 그를 미화해 자서전을 쓰려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그가 출세가 보장된 관료의 길을 단호히 포기할 만한 성격의 소유자인가를 확인하고 싶었다.

한 테이프 안에 신현확의 배짱을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건이 들어 있었다. 비료공장 협상 사건이었다. 1954년 7월경, 그가 상공부 국장으로 근무하고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도 되지 않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6·25전쟁 직후 온 나라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먹을 게 없어 수많은 사람이 굶어 죽었다. 당시 한국은 원조 자금이 있어야 1년 예산을 꾸릴 수 있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비료가 절실했다. 원조 자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 비료를 수입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한국으로서는 비료공장의 설립이 절실했다. 그러나 원조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형편이었다. 미국은 한국 비료공장의 설립을 반대했다. 상공부 국장이던 신현확이 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갔다. 미국 대표가 말했다. “미국 돈 가져다가 미국 물건을 사서 쓰지 않고, 공장 지어 직접 만들려고 하면 우리가 원조를 왜 해줍니까?” 당시 미국의 정책이 그랬다.

1954년 7월 미국을 공식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을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영접하고 있다.

신현확 국장이 맞받아쳤다. “당신들이 주는 ‘원조’가 뭡니까?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의미 아닙니까? 돈을 주면 그 돈은 받은 사람이 알아서 쓰는 것이지, 주는 사람이 계속 따라다니면서 ‘그 돈 여기 써라, 저기 써라’ 하는 겁니까? 그런 걸 원조라고 한다면 한국의 입장에서는 고맙지도 않을 뿐 아니라 차라리 그런 돈은 안 받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강한 국가적 자존심이 담긴 발언이었다. 약소국의 공무원을 대하는 미국 대표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화가 난 신현확 국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소리쳤다. “아무래도 당신들이 텃세를 부리는 것 같소. 다음 회담은 서울에서 합시다. 그때 나 혼자 상대하겠소. 당신들은 10명이 오든, 20명이 오든 상관없소. 대신 다음 회담은 영어를 쓰지 말고 한국말로 합시다.” 신현확은 서류를 챙겨 들고 회담장을 박차고 나왔다.

얼마 후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이례적으로 친서를 보내왔다. 친서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대통령, 당신이 부럽습니다. 신현확 같은 뛰어난 부하를 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김정탁 교수가 전하는 짧은 내용이지만, 깊은 평가가 담겨 있었다. 그 얼마 후 원조 자금으로 충주비료공장이 설립됐다.

신현확, 그는 보통 배짱이 아니었다. 당시 그의 별명은 ‘좌충우돌하는 시골 무사’였다. 그런 배짱의 소유자라면 젊은 날 관료의 자리를 걷어찰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4·19 이후,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를 거치며 그 배짱이 그에게 어떤 시련을 가져올지는 아무도 몰랐다.

녹음테이프를 들으면서 나는 마치 거대한 바위를 보는 것 같았다. 미국에 생존을 맡긴 가난한 나라의 현실에서, 그 정도의 배짱을 가진 관료가 있다는 게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미국에 주눅이 들어 있던 시절이었다.

나는 사건을 의뢰한 그의 아들 신철식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왜 수많은 변호사 중 나를 선택했을까. 차관을 지낸 그는 인맥도 넓었다. 물려받은 재산도 많다는 소리를 들었다. 친해서? 그건 아니었다. 그는 인연을 따라가는 성질은 아니었다. 내가 그 시절의 역사를 제법 공부했다고 해서? 그는 역사학자의 도움은 얼마든지 받을 수 있었다. 그는 왜 나를 선택했을까? 어쩌면 저항 기질이 비슷하기 때문은 아닐까.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나는 다섯 명의 친구와 함께 지하잡지를 낸 적이 있다. 잡지의 내용 중에는 박정희의 3선 개헌을 원색적으로 비판하는 원고도 있었다. 그 잡지가 정보기관의 레이더에 포착됐으면 모두 퇴학을 당했을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 걸리지 않고 넘어갔다.

그 시절 신철식은 엉뚱하게 걸려들었다. ‘급지’에서 문제가 터졌다. ‘급지’란 1년간 학급에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는 소책자였다. 신철식은 급지를 만드는 과정에서 서울에 있는 남녀 고등학교에 설문지를 돌렸다. ‘교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였다. 당시 학교는 병영이었다.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으로 직책이 부여되어 있고 장교와 하사관들이 우리를 훈련시켰다.

신철식의 설문조사가 정보부의 첩보망에 걸려들었다. 반장이었던 그가 남산의 지하실로 끌려가 조사를 받고 왔다.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알전구 하나 매달려 있는 지하방에 있었어. 정보부 수사관이 나한테 선배들 중 누구와 친하냐고 묻는 거야. 내가 만든 설문지가 대학 운동권에서 시킨 걸로 본 것 같았어. 내가 혼자 만든 건데 불 게 뭐 있겠어. 묵비권을 행사하겠다고 버텼지. 일반사회 과목에 그런 게 나와 있잖아? 그랬더니 별별 겁을 다 주더라구.”

그의 단단해 보이는 작은 눈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난 수사관들이 원하는 대답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어. 보내 달라고 사정도 안 하고 눈물도 보이지 않았어. ‘할 테면 해보자’고 끝까지 갔지. 나도 우리 아버지 근성을 물려받은 놈이야.”

학교 다닐 때 그를 보면 매운 고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나같이 가난한 집 아들한테는 한없이 잘해줬다. 그는 서울대학교에 가고 나는 고려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야학 선생으로 공장 노동자인 소년들을 가르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우리 시절엔 그런 친구들이 종종 있었다. 대학의 우리 과에도 청계천 빈민가에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친구가 있었다. 신철식은 신정동 쪽에서 활동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후 그는 공무원이 되고, 나는 변호사가 됐다.

나는 매일 신현확의 육성 녹음이 들어 있는 테이프 내용을 들으며 다음 재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신철식이 나의 사무실에 왔다.

“증거를 찾아봤어? 재판장은 공식 문서가 아니면 믿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내가 물었다.

“아버지가 한일협력위원장을 지내셨기 때문에 일본에 아는 분들이 더러 있어. 전 수상 기시도 계시고. 내가 지금 그런 인맥을 총동원해서 일본 정부 기록보존소를 뒤지고 있어.”
“찾을 수 있을까?” 나는 회의가 들었다. 미군의 폭격이 심하던 당시의 일이다. 도쿄가 거의 잿더미가 됐다. 그런 서류가 존재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일본은 기록을 철저히 보관하는 나라야. 그리고 20년이 넘은 정부 문서는 일반에 공개하도록 되어 있어. 어딘가에 분명 문서가 있을 거야. 업무 수행을 거부하고 일본에서 돌아온 얘기를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내게 여러 차례 말씀하셨어. 나는 그 진실을 의심하지 않아.”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이 그의 얼굴에 번졌다.

“너는 아버지를 인터뷰한 녹음테이프를 더 들어봐. 우리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될 거야.”

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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