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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순의 아무르 답사⑬] 블라디보스토크 개선문, 황태자 니콜라이의 영광과 비극

블라디보스토크 개선문

오늘의 답사일정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중심지 스베트란스카야 거리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토크 개선문이다. 성하의 계절, 녹음이 짙게 깔려 나뭇가지에 가려진 개선문은 머플러로 얼굴을 가린 이슬람 여인처럼 , 숨김의 미를 보여준다.

러시아정교의 비잔틴 전통양식과 유럽형의 아치로 이루어진 이국적인 유라시아의 이 건축물은 어떤 승리의 역사를 담고 있을까?​

이 개선문의 정식명칭은 니콜라이황태자 개선문으로 1891년 러시아 니콜라이황태자의 세계순방과 블라디보스토크 방문을 기념하여 세운 것’이다. 니콜라이황태자(1868-1918)는 알렉산드르 3세 황제의 아들로 로마노프 왕가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되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이 개선문도 황제의 운명과 같이 혁명세력에 의해 1930년대 철거되었다가 2003년에 복원된 것이다.

니콜라이 황태자 청동부조상, 그는 준비되지 않은 황제였다.

1891년 봄, 니콜라이황태자의 나이 23세때였다. 상트페테스부르그에 봄의 햇살이 들기 시작하자, 아버지의 권유로 유라시아 순방계획에 돌입한다. 황태자로서 외교및 견문을 넓혀 세계정세를 파악하고, 제국의 변방인 시베리아와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여 시베리아횡단철도의 건설을 시작하라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의도였다.

이 순방계획은 약 6개월이 소요되는 대도전이었다. 19세기 말의 세계정세, 지리적, 교통여건을 감안하면 거의 탐험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블라디크항의 범선, 번영하는 제국의 항구 <사진 이택순>

니콜라이 황태자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그를 출발하여 기차와 마차를 연결하여 흑해연안의 오데사항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러시아 흑해함대의 순양함으로 갈아타고 지중해로 나아가, 그리스와 이집트를 방문하고 수에즈운하를 통과한다. 함대는 홍해와 인도양을 거쳐 인도, 스리랑카, 태국, 말라카해협, 베트남, 중국을 경유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이 경로는 러시아 발틱함대가 1904년 러일전쟁에 참전할 계획 항로였으나, 영국의 방해로 스에즈운하 통과가 거부된 단축항로이다. 발틱함대는 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하여 쓰시마에 도착하여 시간과 전력의 허비로 일본함대의 제물이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고베로 이동해 교토의 인근 오쓰시를 방문 중 일본측 경비경찰관으로부터 칼로 피습을 당하는 사고(오쓰사건)를 당한다. 니콜라이 황태자는 중상을 입어 러일간에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다. 당황한 일본측은 메이지천황이 의료진을 대동하여 군함으로 들어가, 직접 문병하고 사과하며 위기를 넘겼다. 황태자의 순방은 곡절이 많았다.

일본순방 후 함대는 동해를 항해하여 러시아제국의 동쪽 변방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다. 러시아의 황태자가 극동 영토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한 것은 러시아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그는 여기서 할아버지 알렉산드르 2세 때 쟁취한 동방의 치세를 보게 된다. 청나라(중국)로 부터 아므르강(흑룡강) 북쪽과 우수리강 동쪽(연해주) 광활한 영토를 쟁취했다. 러시아의 영토가 태평양과 일본, 조선국경까지 확장되는 대단한 치적을 확인한 것이다.

​황태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역사적인 시베리아횡단철도 기공식에 참석하고, 이를 기념하여 니콜라이2세 황태자 개선문을 건립하게 된다. 그 후 그는 아무르강(흑룡강) 연안을 배를 타고 이동하며 이루쿠츠크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상트페테르부르그에 5개월만에 귀환한다.

​그가 귀환중 아무르강(흑룡강)에서 바라본 만주대륙은 러시아에게 또 다른 기회의 땅이었을까? 극동 순방은 그의 안목을 동방으로 향하게 한 것만은 분명하다.

러시아의 19세기 말 외교전략 유럽의 균형유지, 아시아의 팽창주의와도 부합하는 방향이었다. 당연히 아세아의 신흥강국 일본과는 충돌하는 위험을 내포한 것이었다.

체사레비치(황태자) 니콜라이, 블라디보스토크 방문.1891년 5월 19일-6월 1일<사진 이택순>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하고 난 3년 뒤 1894년, 니콜라이황태자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3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황제(차르)에 오른다. 그 대관식은 2년 뒤 1896년 모스크바 우스펜스키 대성당(현재 크렘린박물관)에서 세계의 사절이 모인 가운데 최고의 위엄과 영광 속에서 이어진다.

이 대관식에 조선에서는 민영환이 대표로 윤치호가 수행원으로, 연해주의 대표로 고려인 최재형이 참석한다. 조선인이 세계외교 무대에 처음으로 입장한 것이다. 체계적인 제왕학을 익히지 못한 채, 갑자기 차르에 오른 니콜라이 2세는 대관식 날부터 대형사건으로 얼룩진다.

​즉위 축하선물을 받으려는 50만명의 인파가 운집하여 1389명이 압사당하는 호딘카의 비극으로 대형참사가 벌어져 민심은 시작부터 비판적이었다. 사고는 또 이어져 빵을 요구하는 평화적 시위에 황궁시위대가 발포하여 수천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은 결정적으로 민심을 등 돌리게 하였다. 이는 통치기간 중 계속하여 정치적 불안정을 초래한 원인이 된다.

​니콜라이 2세가 황제의 지위를 승계했을 때 1894년 극동에서는 조선의 패권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이 쟁패하는 청일전쟁이 벌어진다.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한반도를 중국으로부터 분리시켜 일본의 완전한 영향권으로 만들고, 대만과 요동반도를 할양받고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뜯어낸다.

이 사태에 개입해 러시아는 독일 불란서와 연합하여(3국간섭) 일본의 요동반도 점령을 포기시키고, 과도한 배상금을 감액했다. 일본은 삼국의 간섭에 대항할 국력이 되지 못했다. 일본의 압박에 직면한 청국(중국)과 조선에게는 러시아는 든든한 배경이 될 수 있음을 과시하였다.

​러시아는 당연히 중재의 대가를 요구했다. 청국(중국)으로 부터는 만주지역의 ‘동청철도 부설권’을 획득(1896년)하고 1898년에는 요동반도의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을 획득하면서 만주(동북3성)에 대한 깊은 영향력을 확보했다. 동청철도 부설권’은 단순한 철도의 건설 운영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철도역및 주변지역에 철로보호를 위한 군대주둔을 허용하고, 광범위한 관리권을 행사하면서 만주 전체에 대한 준 관할권이 행사되는 수준이었다.

​조선에도 삼국간섭의 영향이 미쳐, 1895년 고종과 민비 주도하에 친러정부가 들어서며 일본의 직접적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벌어진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일본은 군대와 낭인을 동원하여 일국의 왕비인 민비를 경복궁 건천궁에서 살해하는 만행(을미사변)을 저질렀다. 제국주의의 행태는 이런 흉악한 모습이었다.​

공포에 질린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으로 피난(아관파천)을 하고 니콜라이 2세는 피난을 허용하면서 한반도에 강력한 영향력도 확보했다. 이후 조선은 일본과 러시아에게 광물자원과 철도부설권 등 각종이권을 양도하고 미국 영국 등 선진 열강까지 가세하여 이권쟁탈의 먹이감으로 전락한 것은 청나라와 같은 형편이었다.

​대륙진출의 기회를 제지당하며 10년간 복수의 칼을 갈던 일본은, 영국과 동맹(영일동맹)을 체결했다. 미국과는 필리핀의 영유권을 미국에 인정하면서(카쓰라-태프트밀약) 러시아와의 전쟁을 주도면밀하게 대비했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를 조선의 제물포항과 뤼순(여순)항에서 기습 공격했다. 러시아는 세계의 예상과는 달리 중국 대륙의 지상전투에서도 패배하고 긴급지원 차 파견한 발틱함대마저 쓰시마해협에서 일본 해군에게 격파당했다.

블라디크역사에 새겨진 니콜라이2세 황태자의 부조상

세기 말에 불어닥친 폭풍노도의 시대는 유약한 황제에게는 넘기 어려운 벽이었을까?

1905년 러일전쟁의 충격적 패배는 러시아 국내위기를 증폭시켰다. 해군수병들의 반란과 전쟁으로 기아상태에 빠진 노동자들과 시민시위로 사회적 갈등이 증폭된다.

​니콜라이 2세는 “카리스마와 지도력이 부족하며, 제국을 통치할 능력이 모자라는 평범한 한 가장에 불과하다”는 낮은 평가를 받는 황제였다. 1905년 10월 부득이 황제의 권한을 제한하고 의회를 강화하며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보장하는 조치가 긴급히 시행되었다.

​명망 높은 제상 세르게이 비테(1849-1915)는 경제개혁으로, 표트르 스톨리핀(1862-1911)은 정치사회개혁으로 보필했다. 특히 스톨리핀의 강력한 개혁정책은 큰 진전을 이루었다. 그가 강경파에 암살되지 않았다면 러시아는 안정적으로 입헌군주제로 나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역사의 큰 아쉬움을 남긴 인물이었다. 레닌도 말하기를 “스톨리핀의 개혁이 성공했다면, 볼세비키 혁명은 없었을 것”이라고까지 언급했다.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역량으로서는 당면한 위기를 극복할 수 없었다. 시대의 요구인 자유와 개혁과 민생을 외면하며 반동적인 황제체제 유지에 급급했다. 지지부진한 개혁정책과 차리즘(황제주의파)의 득세는 노동자들의 불만을 고조시킬 뿐이었다.

​결국 1914년 1차세계대전에 휘말려, 패전의 상황에서 1917년 레닌이 주도한 노동자 농민의 봉기로 (2월혁명과 10월혁명) 23년의 황제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평범한 필부로 일생을 마치고 싶어하는 작은 소망마저 과격 혁명당원에 의해 파괴된다.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비운을 겪으며 로마노프가는 역사의 뒤로 사라진다.

블라디크 개선문에서, 조선의 망국을 보다.

니콜라이 2세는 철저히 무능했고 제왕의 그릇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존재로 평가되는 패망의 러시아 황제였다. 그러나 한줌의 도움이라도 얻어보려 했던 조선과 고종에게는 한때 구세주 같은 존재였다. 제국의 동방영토 블라디보스토크는 고려인의 보금자리가 되었고, 한인 독립투사들의 성지가 되었다. 그가 남긴 자취, 블라디보스토크 개선문에서 약소국의 비애와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이택순

전 경찰청장, '이택순의 실크로드 도전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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